[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야심 찬 협약을 위해 다 함께 일어섭시다. 협약을 마무리합시다! (Let‘s stand up for ambition, let’s get it done)” (르완다 대표단)
“협상 지연은 죽음이고 행동만이 살길이다 (Delay is dead. Action is survival)” (파나마 대표단)
르완다와 파나마 대표단의 발언에 강력한 협약 성안을 요구하던 대표단과 참관인들이 기립 박수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르완다는 일회용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한 최초의 국가 중 하나다. 파나마는 이번 협약에서 91개국을 대표해 초안에 플라스틱 생산 감축 목표를 담은 부속서를 채택하자는 제6조 제1항을 제시했다.
이처럼 플라스틱 오염을 끝내려는 국가들의 분투와 여섯 시간가량 이어진 마라톤협상에도 불구하고, ‘해양 환경을 포함한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국제협약’을 마련하는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5)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폐막했다. 핵심 쟁점으로 꼽혔던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반대하는 국가들을 설득하지 못한 게 주된 이유다.
2024년 말까지 다섯 차례의 협상을 통해 국제협약을 마련하기로 한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대신 이어질 협상에서 의미 있는 국제 협약을 끌어내기 위해 각국이 전략과 대안 등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주장이다.
제5차 협상위 의장단은 일부 조항에서 당사국의 이견을 좁혔다고 자평했다. 이날 마지막 본회의에서 루이스 바야스 발비디에소 의장은 “합의점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춰 많은 영역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합의가 필요한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다”며 “생태계와 인간 건강에 미치는 심각한 플라스틱 오염의 영향을 되돌리고 바로잡는 우리의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모두가 단호하고 신속하게 걸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현장을 지키던 참관인과 환경단체 사이에서는 ‘예견된 실패’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일주일 협상 과정에서 지난달 29일과 1일 두 차례 발표된 협약 초안을 보면, 분량은 줄었지만 되레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승은 녹색연합 녹색사회팀장은 “많은 의견을 모두 담은 포괄적인 초안이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가지고 본 회의에서 합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들이 나왔었다”고 설명했다. 예정된 폐막일인 1일 본회의가 지연된 끝에 오후 9시를 넘겨 시작됐다.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두고 끝내 산유국 등을 포섭하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91개국을 대표해 파나마 대표단은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명시한 제6조 제1항을 제안했고, 여기 100여 개국이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에 그쳤다. 국제 협약은 만장일치를 기반으로 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중국 등 산유국과 석유화학 산업에 기반한 국가들까지 해당 조항에 호응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도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관한 조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국내외 환경단체들은 산유국 및 플라스틱 생산 국가들이 동참하지 않고서는 플라스틱 오염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만큼, 다음 협상에서는 이들을 아우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레이엄 포브스 그린피스 글로벌 플라스틱 캠페인 리더는 성명을 통해 “각국 정부 대표단은 다음 회의에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 목표와 실질적인 조치를 포함한 효과적인 협약을 도출해야 한다”며 “소수의 국가와 화석연료 및 석유화학 업계가 전 세계 대다수 국가의 노력을 가로막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협상 과정에서 참관인을 배제하는 관행에서 벗어나고, 플라스틱 오염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최우선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허승은 팀장은 “플라스틱 오염이 심각하고, 이를 해결하려면 구체적이고 실행할 수 있는, 혹은 강력한 협약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현장에서 많이 느꼈다”며 “산유국 등은 여러 국제 기후 회의에서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지금은 관철되지만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반대하는 국가들까지 동의하는 협약을 ‘개문발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생산과 관련된 조항은 선언적인 수준으로 합의하고, 다양한 해결책을 촘촘하게 짜나가자는 이야기다.
결국 산유국과 플라스틱 원료 생산국 외 대부분의 국가에 주어진 과제는 일회용품 등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고 재사용 체계를 안착시키는 데 있다는 이유에서다. 협약 초안에서 플라스틱 제품 및 디자인을 다루는 제3조와 제5조를 구체화하는 방식이 제시됐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생산 감축에 ‘올인’하면서 오히려 협약 성안 자체가 늦춰지는 ‘치킨 게임’ 양상으로 갔다”며 “산유국 등의 생산 감축 동의를 끌어내는 게 가장 좋은 방식이지만 이와 함께 대안도 있어야 한다.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면 자연히 생산을 압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플라스틱 오염을 끝낼 국제 사회의 협상은 내년까지 이어진다. 이번에 부산에서 열린 제5차 협상위를 5.1차로 두고, 내년에 열릴 추가 협상회의는 제5.2차 협상위가 된다. 각국의 이견이 고스란히 나열됐던 이날 초안에서 다시 논의를 시작한다. 아직 날짜와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2025년 8월 이후에 개회될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