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 상법 개정안, 이사 충실의무·보호의무 모두 포함

불필요한 고발·소송…경영권 공격수단 악용 우려

신사업 투자·M&A 추진도 위축…기업가치 하락 유발

4대 그룹 등 주요 기업 사장단 21일 긴급 성명 발표

서울시내 기업 전경
서울시내 기업 전경 [헤럴드DB]

[헤럴드경제=정윤희·김은희·김민지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주주들에 대한 기업 이사들의 의무를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재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와 ‘보호 의무’를 모두 명시한 것으로, 기업 경영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20일 재계 및 국회에 따르면, 민주당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고 ▷직무수행시 총 주주의 이익을 보호·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여기에 ▷이사 선임 과정에서 집중투표제 도입 ▷분리선출 감사위원 이사 수 확대 ▷사외이사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하고 전자주주총회 방식 도입 등도 포함했다. 민주당은 해당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정하고 연내 처리키로 했다.

재계에서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대내외적 경영환경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기업경영에 큰 영향을 주는 상법 개정안을 섣불리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해당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이사에 대한 불필요한 소송 남발,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 등의 리스크가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집중투표제 등이 외국계 행동주의펀드들의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당장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 4대 그룹을 포함한 주요 기업 사장단은 21일 긴급 성명 발표를 예고하고 나섰다. 경제단체장이 아닌 재계 주요 사장단이 모여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상법 개정안 등 규제 입법을 지양하고 주요 산업에 대한 투자 지원을 촉구한다는 계획이다.

기업들은 해당 상법 개정안이 소수 주주 이익 보호라는 입법취지와 달리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관계자는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가 명문화되면 이사에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돼 배임 신고나 고발이 늘어날 수 있고, 기업과 주주 모두 혼란을 겪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이사들은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모험적인 투자나 인수합병(M&A)를 추진하지 않게 되고, 결국 기업은 성장동력을 잃고 밸류업(기업가치 제고)를 오히려 저해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대한상의가 153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주주로 확대될 경우 M&A 계획을 재검토하거나(44.4%), 철회 또는 취소(8.5%)하겠다는 응답이 절반 이상(52.9%)을 넘어갔다. 이사 충실 의무 확대가 국내기업의 M&A 모멘텀을 저해한다는 응답도 66.1%(크게 저해 10.5%, 다소 저해 55.6%)에 달했다.

이 같은 우려에 A기업 관계자는 “기업의 수많은 경영판단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주주들이 이사들에게 소송을 남발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인들은 신산업 진출이나 M&A 등 투자를 주저하게 될 것”이라며 “이사가 다양한 주주들의 이익을 모두 확인하고 합치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속한 투자 의사결정이 저해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치권이 오히려 상법 개정안을 통해 기업 경영의지를 꺾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B기업 관계자는 “가뜩이나 불확실한 경기 상황에서 사활을 걸고 버티는 중인 기업 입장에서 상법 개정이 초래할 수 있는 이사에 대한 불필요한 소송 남발,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 등 리스크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라고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C기업 관계자 역시 “대내외 급격한 정세 변화로 가뜩이나 어려워진 경영 활동이 더욱 위축될까 걱정된다”며 “해외 투기 자본의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변질돼 기업 경쟁력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는 만큼 기업의 걱정과 우려에 정치권이 귀 기울여 주길 호소한다”고 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관계자는 “(상법 개정안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고 (법 통과시) 기업 현장에서의 혼란이 불 보듯 뻔하다”며 “여러 규제가 중복해서 들어가는 등 법리적으로도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규제 당사자인 기업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고 강행하는 것이 정책결정에서 바람직한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한경협이 자산 2조원 이상 상장기업 150개를 대상으로 지배구조 규제 강화 시 상장사 이사회 구성변화를 분석한 결과, 감사위원 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 도입 등을 포함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30대 상장기업(2023년말 자산 기준, 공사·금융사 제외) 중 8개사의 이사회가 외국 기관투자자 연합에 넘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에 한경협·대한상의·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 경제8단체 역시 지난 14일 공동 입장문을 통해 상법 개정안에 대해 ‘해외 투기자본 먹튀조장법’이라고 비판했다. 경제8단체는 “섣부른 상법 개정은 이사에 대한 소송 남발을 초래하고,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돼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크게 훼손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