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열 총재 “구조조정 TF서 충분히 논의해야”

[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시간은 자꾸 가는데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멀리 돌아가는 길밖에 없죠. 현재 한국은행 외에는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곳이 없어요. (한은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최근 도마 위에 오른 기업 구조조정 해법을 놓고 한 정부 관료 출신 인사가 한 얘기다.

정부의 조선ㆍ해운사의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한국은행의 역할론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선별적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들며 한은에 구조조정을 위한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참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4월 19일 열린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가 생각에 잠겨있다.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지난 4월 19일 열린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가 생각에 잠겨있다.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국민적 합의나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고수해 온 한은도 미묘한 톤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간 정부와 한은이 서로 ‘핑퐁게임’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돼 온 가운데, 당장 법정관리 신세를 맞게 될 지 모르는 조선ㆍ해운사들은 정부와 한은의 ‘빅딜’이 이뤄지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2일 한은 집행간부회의에서 “기업 구조조정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으므로 한은의 역할 수행 방안에 대해 다시 한 번 철저히 점검해 주길 바란다”면서 “특히 ‘국책은행 자본 확충 협의체’에 참여해 관계기관과 추진방안에 대해 충분히 논의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총재의 발언은 기업 구조조정 논란이 정부와 한은 간 갈등으로 비화되는 분위기를 서둘러 수습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시장에서는 이를 계기로 한은이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총재는 이날 출장길에 올라 3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아세안(ASEAN)+3 재무장관ㆍ중앙은행총재 회의와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등에 함께 참석한다.

4일 기재부와 한은, 금융위원회,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관계자가 참석하는 구조조정 태스크포스(TF) 첫 회의가 열리는 만큼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관련 논의가 이뤄질 것이란 예상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번 출장은 아시아지역 국가 간 경제협력을 증진하고 금융시장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지만, 구조조정 재원마련 방안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현지에서 회동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유일호 부총리와 이주열 한은 총재가 현지에서 만나 구조조정 재원 조달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 협력을 모색할 방안을 도출해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두 기관은 공식적으로 두 수장간 회동 일정이 잡힌 것은 없다고 부인했지만, 비공식적인 만남은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번 출장 기간 일정이 각각 잡혀있는 기자간담회에서 유일호 부총리와 이주열 총재가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조선ㆍ해운사들은 정부와 한은의 구조조정 논의가 지연되면서 피 말리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해운사들의 경우 5월 중순까지 용선료(선박 사용료) 인하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된다.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넘기지 않으려면 이달까지는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에 대한 결론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구조조정을 위한 국책은행 자금 수혈이 발등의 불인 상황에서, 양측이 명분싸움으로 샅바싸움을 하는 것보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산은과 수은이 주요 조선ㆍ해운사에 빌려준 여신 규모는 21조2000억여원에 달한다.

수은의 경우 대우조선해양에만 빌려준 돈이 9조원에 육박한다.

그 결과 수은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1분기 말 현재 9.89%로 경영실태평가 1등급 기준(10%)에도 못 미치는 상태로 전락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곳간이 떨어진 정부는 재정을 투입해 국책은행을 지원하기 어렵다.

추가경정예성을 편성하는 방식은 여소야대 정국이 된 20대 국회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별적 양적완화를 통해 산은과 수은이 구조조정을 위한 ‘실탄’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구체적으로 한은이 산은채를 사들이거나 수은에 출자하는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언론사 경제부장 간담회에서 “중앙은행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산은법을 개정해 한은이 산은에 자본금을 출자하거나 산은이 발행하는 조건부 자본증권(코코본드)을 매입하는 방안 등을 추진할 수 있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을 일정 수준 뒷받침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방식과 관련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한은이 지난 외환위기 때 부실채권정리기금 마련을 위해 자산관리공사 채권을 2조원 가량 매입해 줬던 것처럼 지원에 나서야 한다”면서 “미국이 금융위기 이후 의회 동의를 받아 시행한 부실자산구제기금 같은 방식도 있다”고 제안했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산은에 대해서는 신용한도 대출에 구조조정 기금을 넣어서 대출해주는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면서 “한은이 직접 산은채를 매입하는 방안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데 통과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

한은 금통위원을 지낸 강명헌 단국대 교수는 “중앙은행이 특정 산업을 돕기 위해 자금을 푸는 것은 경제위기나 국가 비상사태 때 동원해야 하는 최후 수단”이라면서 “정상적 통화정책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금리 인하나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올리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spa@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