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릴러 영화 한단계 업그레이드… ‘악의 연대기’주연 손현주
표정·눈빛·대사 등 살아있는 디테일 동료들과도 짐짓 대화 끊고 고독 자초 작품·실생활 구분없는 철저한 몰입 “워낙 평범한 얼굴, 뭔가 보여주려면…” ‘추적자’이후 스릴러물 연속 캐스팅 행운 “언젠간 연극무대에도 서고 싶어”
간혹 배우의 얼굴에만 시선이 가는 작품이 있다. ‘악의 연대기’(감독 백운학ㆍ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가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손현주(50)의 표정과 눈빛, 대사 톤 등의 미세한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자신감 넘치던 최창식 반장(손현주 분)의 얼굴은,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은 뒤 생기를 잃어간다. 그 모습은 ‘더 테러 라이브’(2013) 속 하정우를 떠올리게도 한다. 폭발물의 공포가 엄습해 오면서, 말끔했던 앵커(하정우)는 시시각각 애처로운 행색으로 변한다.
손현주 역시 감정 표현과 대사 전달은 물론, 까칠하게 자란 수염, 충혈된 눈, 헝클어진 머리 등 디테일로도 최 반장이 처한 상황 한 가운데에 관객들을 데려다 놓는다.
‘악의 연대기’에서 최 반장은 특진을 앞두고 우발적인 사고로 사람을 죽게 만든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담당자가 되면서 사건을 은폐할 기회를 잡지만, 진실을 감추려고 할 수록 더 곤란한 상황에 휘말릴 뿐이다. 손현주는 “최 반장에게도 순수하고 정의로운 시절이 있었다. 살다 보니 삶의 때가 묻었고, 어느 순간 그게 때인지도 모르게 됐다. ‘이 정도 때 쯤이야’에서 악의 연대기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현주는 이번 작품이 유독 힘들었다. 현장에서 늘 대화 상대가 있었는데, 이번엔 동료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익히 상상할 법한 불화와 같은 문제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최 반장’을 연기하면서, 카메라 뒤에선 얼굴을 바꿔 수다쟁이가 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역할에 몰입하면서 스스로 답답함과 고독감을 자초한 셈이다. 2012년 SBS 드라마 ‘추적자’를 찍을 당시에도, 주위 사람들이 배신하는 극 중 상황에 실제로도 절대고독을 느꼈다. 술을 먹으며 울기도 했다.
그는 작품과 실 생활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이유에 대해 “내 얼굴이 워낙 평범해서 그렇게 해야만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졌어요. 내가 영화 결말을 알고 있는 것조차 자칫 티가 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시나리오 뒷 부분을 안 보려고도 했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 가급적 결말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죠. 또 나와 관객만이 사건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부분을 얼굴에 어느 정도 드러내야 할지 고민이 컸어요. 동료들이 눈치 챌 만큼 드러나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절제해서 표현하면 연기적으로 아쉬우니 그 점이 가장 힘들었죠.”
그 와중에 백운학 감독의 디렉션은 집요했다. 극 후반 최 반장이 차량을 타고 이동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촬영 당시 백 감독은 손현주에게 눈빛이 너무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분노와 좌절, 불안, 슬픔 등 8종의 감정을 연기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이에 손현주는 ‘감독님이 한 번 해보시라’는 우스개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는 “시나리오엔 ‘간다’ 정도의 지문이 전부였다. 이건 마치 사극에서 ‘한밤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라는 지문을 일주일 동안 촬영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감독님의 디렉션과 100% 일치하진 않아도 그런 감정을 뽑아내려고 노력하는 게 연기자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내적 갈등은 겪었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화목했다. 손현주가 제안한 공동의 약속을 후배들이 잘 따라준 덕분이다. ‘악의 연대기’는 ‘표준근로계약서’(영화 현장 스태프의 처우 개선을 위해 법정 근로시간 준수, 초과 근무시 수당 지급, 4대보험 가입 의무화 등을 명시한 계약서)가 도입된 작품이다.
따라서 촬영 회차가 늘어나면 한정된 제작비로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촬영 당시 해 뜨는 시간이 빨라지면서 야간 촬영에 주어진 시간은 짧아졌고, 백운학 감독은 촬영장 한 구석에서 속앓이를 했다. 이를 눈치 챈 손현주는 동료 배우들을 다독여 시간을 엄수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어떤 현장에서든 ‘약속’을 항상 강조해요. 배우들이 시간 약속을 잘 지키면 작업이 금방 끝나죠. 현장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좋아져요.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시간 약속은 꼭 지키자고 해요. 협업으로 작품이 나오는 건데, 그 점이 짜증나고 괴로우면 연기 자체를 하지 말아야겠죠.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선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해요.”
최근 손현주는 스릴러 영화 복이 터졌다. 560만 관객을 모은 ‘숨바꼭질’(2013)로 한국 스릴러 흥행 기록을 새로 쓰더니, 또 다른 스릴러 영화 ‘악의 연대기’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차기작( ‘더 폰’)까지 스릴러 영화가 예약돼 있다.
‘추적자’에서 부조리에 맞선 소시민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낸 뒤, 무게감 있는 역할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손현주 하면 드라마 ‘첫사랑’(1991)에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를 흥얼거리던 순박한 얼굴부터 떠올랐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스크린 속 피로하고 경직된 얼굴, 오랜만에 떠올리는 서글서글한 얼굴, 어느 쪽도 어색함은 없다. 과연 배우는 배우다.
“한동안 바람 피우는 남편, 처가살이 하는 역할 등을 쭉 하다가, ‘추적자’에서 아내도 잃고 아이도 잃은 갈 곳 없는 남자를 연기했어요. 당시 다른 드라마가 편성됐었는데 그게 엎어지면서 우리 드라마가 들어간 거예요. 세 번 정도 회의에 올라갔다가 계속 (편성이) 좌절되면서 ‘언젠간 되겠지’ 했는데 갑자기 기회가 온 거죠. 사람은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때가 되면 또 밝은 역할도 하겠죠. 지금이 영화를 하는 때라면, 대학로 출신이니까 언젠가 연극 무대에도 다시 올라가겠죠.”
이혜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