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겨울과 봄의 문턱에서 봄의 징후는 바람으로 먼저 느낄 수 있습니다. 2월 막바지의 바람에는 봄의 훈기가 살짝 스며들어있습니다. 봄을 닮은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면, 몸 깊숙이 박혀 빠져나올줄 모르던 한기도 슬그머니 발을 빼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시장 곳곳에선 이미 속이 노랗게 자란 봄동 판매가 한창입니다. 봄동은 겨울에 자랐지만 그 아삭한 식감과 상큼한 맛에는 봄의 지문이 날인돼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겨울은 봄을 예비하는 계절입니다. 2월이면 춥고 메마른 땅을 뚫고 고개를 드는 설강화(雪降花)는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부지런한 봄의 전령사입니다.
설강화의 본명은 그리스어로 우유를 의미하는 ‘갈라(gála)’와 꽃을 의미하는 ‘안토스(ánthos)’를 합친 갈란투스(Galanthus)입니다. 설강화는 봄이 오기도 전에 피우는 꽃의 모양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닮아 스노드롭(Snowdrop)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명보다 별명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듯, 갈란투스보다 스노드롭이나 설강화란 이름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등장인물 ‘쓰레기’를 본명 ‘김재준’으로 부르는 일이 어색하듯, 가느다란 줄기로 영롱한 꽃을 매달고 하늘거리는 이 꽃을 설강화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마음이 통한 걸까요? 설강화를 가리키는 국제어 에스페란토 단어는 ‘neĝborulo’로 ‘눈을 뚫는 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군요.
척박한 계절을 헤치고 피어난 설강화는 봄의 많은 풍경들을 상상하게 합니다. 연둣빛으로 곱게 물든 산하, 온갖 색으로 피어난 들꽃들, 그 위로 쏟아지는 바삭바삭한 햇살……. 설강화의 꽃말은 ‘희망’입니다. 또한 설강화는 1월 1일의 탄생화이기도 합니다. 설날이 지나고 나니 이제야 새해를 실갑합니다. 지난해 온갖 대형사고가 이어졌던 와중에도 우리는 밥 한술을 넘기기 위해 얼마나 뜨거운 삶을 치러내야했던가요. 그 뜨거운 삶이 새해엔 감동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내려도 찬바람이 불어도 굴하지 않는 저 작은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