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정아·김희량 기자] 점점 강도를 더하는 정부의 가격 인하 ‘공개 압박’에 밀가루를 생산하는 제분업계가 7월 출하가격을 인하한다. 이에 ‘서민 음식’인 라면값도 13년 만에 소폭 인하될 것으로 예상된다. 라면의 주원료인 밀가루 가격이 내리면서 라면업체로서는 사실상 가격 인하를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면업체들은 밀가루 가격을 제외한 원료비, 물류비, 인건비 등 생산 비용이 높아 라면값 인하에 여전히 난색을 표하면서도, 하나둘 가격 인하에 동참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라면값 못내려? 그럼 밀가루값부터”…‘압박’ 높이는 정부
27일 업계에 따르면 라면업체들은 제분사로부터 납품가에 대한 구체적인 인하 폭을 전달받으면, 추후 관련 검토를 통해 가격 인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업계 1위’ 농심 관계자는 “제분사가 구체적인 납품가 인하에 대한 공문을 전달해오면, 라면값 인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오뚜기·삼양식품·팔도 측은 “아직 특별하게 결정된 것이 없다”면서도 “밀가루 가격 인하에 따른 여러 가능성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26일 농림축산식품부는 CJ제일제당, 대한제분, 삼양사 등 7개 제분사와 간담회를 가진 뒤, “제분업계는 밀 선물가격 하락과 물가안정을 위해 7월에 밀가루 출하가격 인하 가능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며 사실상 밀가루 공급가격 인하를 공식화했다. 식품업계 관계자도 “7월부터 농심 등 제분 대량 구매처에 판매장려금을 높이는 방식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모션을 검토하고 있다”며 “(이렇게 되면) 제분 가격이 5% 안팎 인하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MB 정부 이후 처음…사실상 ‘물가와의 전쟁’ 선포
이는 18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기업들이 적정하게 라면 가격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발언한 지 불과 열흘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밀 가격은 많이 내렸는데 제품 값이 높은 것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 가능성을 좀 더 열심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언급했을 만큼, 정부는 사실상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라면업계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0년 제품 가격을 인하한 뒤 지금까지 한 번도 가격을 내린 적이 없다. 지난해 9~11월에도 라면 가격을 대폭 올렸다. 업체별로 ▷농심 평균 11.3% ▷오뚜기 11% ▷팔도 9.8% ▷삼양식품 9.7%의 인상률을 적용했다. 당시 업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치솟은 밀가루, 팜유 등 원부자재 가격 상승을 근거로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설명을 붙였다.
이로 인해 올해 1분기 라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체 소득 증가율과 비교해 3배를 넘어섰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5월 라면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24.04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폭(14.3%)을 기록했다.
다만 생산 비용 상승에 따른 라면업계의 고심도 깊다. 일례로 농심은 올해 1분기 원재료 매입에 2531억원을 썼다. 지난해 1분기 원재료 매입액(2284억원) 보다 10.8% 지출액이 늘었다. 같은 기간 포장재 등 부재료 매입액도 1012억원에서 1117억원으로 10.4% 늘었다. 농심 관계자는 “가격이 인하된 원재료도 있지만, 반면 인상된 원재료도 있다”라며 “밀가루라는 한 가지 인하 여건만 보고 제품가를 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밀가루값 내렸으니…빵·과자 가격인하 ‘압력’ 거세질듯
한편 이번 제분사의 결정에 따라 빵, 과자류 등 밀가루를 사용하는 제과·제빵업체들도 가격 인하 압력을 받게 됐다. 그러나 제품 값 인하를 고려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 측의 중론이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식품업체들은 빅테크 기업처럼 영업이익률이 10~20%대를 내는 회사가 아니다”라며 “대다수는 (영업이익률이) 1~2%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격 인하 결정이 정말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과·제빵도 제품별로 밀 사용률이 다르다”며 “(가격 인하) 관련 검토는 하겠지만, 값을 내리는 건 쉽지 않은 문제”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