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이오아누 ‘잉크’ 아시아 초연
오는 12~14일, 국립극장 달오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총연출
물을 소재로 담아낸 인간의 욕망과 어둠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무대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거세진다. 얕게 차올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첨벙거리는 무대 위로 두 남자가 존재한다. 태초의 인류인듯, 갓 태어난 아이인 듯 나체의 젊은 남자와 그를 조련하고 사투를 벌이는 듯한 또 다른 남자. 두 남자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시작된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총연출을 맡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잉크’(5월 12~14일, 국립극장)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 관객과 만난다. 이 작품은 “무용도, 연극도 아니다”.
“장르를 설명하거나 규정하기 어려운 작품이에요. 대사가 전혀 없으니 연극이라 하기도 어렵고, 동작을 짠 것이 아니기에 무용이라 하기도 힘들죠. 제가 가진 역량을 바탕으로 연극과 무용 사이 어딘가에 길을 찾아 만든 하이브리드 작품이에요.”
‘잉크’를 가득 채운 것은 상징의 세계다. 이 무대의 중요한 소재는 ‘물’이다. 우주의 기원이자 원형인 물을 활용해 인간의 몸과 시각적 이미지를 결합한 무대를 만든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파파이오아누는 “물이라는 요소를 선택하게 되는 지성적, 의식적 이유는 잘 모르지만,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을 만큼 좋아하는 소재”라고 말했다.
파파이오아누는 2017년 첫 내한 당시 선보인 ‘위대한 조련사’와 ‘메데아’에서도 물을 소재로 비범한 시도를 풀어냈다. 그는 “물을 뿌리는 데에 큰 매력을 느껴 다시 활용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소재는 물로 결정했지만, 미리 정해둔 서사는 없었다. 다만 “두 명의 인물(파파이오아누, 슈카 호른)”을 중심으로 “물을 뿜는 요소”를 활용하겠다는 것만 정해둔 채 연습에 돌입했다.
“저의 작업방식은 무엇을 하고자 명확히 정한 뒤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에요. 연습하는 과정에서 내가 원한 것을 자연스럽게 찾아나가는 방식이죠. 연습을 하면서 떠오른 서사는 수정하고 명료하게 다듬어 작품으로 만들죠.”
‘잉크’의 연습 과정에선 “사냥꾼이나 아버지의 이야기, 인간의 욕망에 관한 서사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둠의 과정에 대한 서사도 떠올랐다”며 “떠오른 뒤엔 기꺼이 받아들인 서사”라고 했다. 물의 속성에선 새로운 점도 발견했다. “옷감이 물에 젖었을 땐 비닐처럼 빛을 반사하고, 비닐이 움직일 땐 물과 같다는 점을 발견했어요. 비닐에 고여있는 물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은하계 같더라고요. 그 과정이 참 흥미로웠어요.”
무대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두 남자는 대립하면서도 연대하고 공존한다.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같기도 하고, 혹은 연인의 모습 같기도 하다. 외면하고 싶은 내면의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작품이 2020년 이탈리아 토리노 댄스 페스티벌 초연 후,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시학의 정수”, “동시대의 신화”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이 작품에서 그리스 신화에서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잉크’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에서 파파이오아누는 그리스 신화에 천착해왔다. 그는 “그리스인인 나의 입장에선 어느 문화에서나 그리스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서 하이브리드적인 것을 하는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원형을 마주하고 차용하는데, 그 때 필연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만나고, 그리스 문화에 다가서게 돼요. 나르시시즘도 한 예가 될 수 있죠. 제 작품에선 그리스 신화와 관련한 요소들이 많이 발현되는데, 그건 제 성장과정으로 인해 나오게 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제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이에요.”
뒤틀리고 왜곡된 신체의 움직임은 시각예술과 만나 독특한 미학을 완성한다. 한 편의 시나 추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별칭이 ‘무대 위의 시인’인 이유다. 그는 “무대 위의 시인은 예술가로의 나와 나의 역할을 정의하는 말”이라며 “시인은 ‘하다’, ‘하는 자’라는 뜻이다. 행동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다.
차원 높은 상상력과 초현실적 무대는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화가이자 만화가로 활동하다 공연으로 무대를 확장한 파파이오아누의 예술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연출가 로버트 윌슨, 안무가 피나 바우쉬를 만나며 예술 세계를 넓혀갔다. 갤러리 안에 전시된 작품으로 관람객을 만날 때와 달리 공연예술로 확장한 뒤 그는 동시대 사람들과 더 가까이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인간의 신체에 대한 표현의 갈증 때문에 춤의 매력에 빠지게 됐어요. 춤을 배우며 새로운 표현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죠. 전 화가의 눈으로 무대예술을 하고 있어요. 캔버스 위에서 보다 무대 위에서 더 좋은 화가라고 생각해요.”
‘무대 위의 시인’이 펼쳐놓은 추상의 세계는 낯설고 어려울 수 있다. 그리스 신화부터, SF영화 ‘에이리언’의 공상적 장면,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춘화 속 문어 형상 등 신화와 영화, 그림을 망라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떠오른다.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기에 관객마다 내놓는 답변도 다를지 모른다. 파파이오아누는 작품을 통한 메시지나 작품의 의미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는 “나의 이야기는 공연을 마친 이후에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공연 마지막날인 14일엔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는다.
“작품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최고의 적임자는 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 역할은 실행하는 것이죠. 분석은 다른 사람들의 몫이에요. 관객들은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공연이라는 장르는 어떤 명확한 이해를 바랄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이 작품은 심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이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공연을 본 사람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해주길 기대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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