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 멜버른여행④

[헤럴드경제=함영훈 선임기자] 멜버른 중심가에서 서쪽 40㎞ 지점에 있는 단데농 산자락에는 예쁜 산촌 사람들이 농업과 목축업을 하며 모여산다.

교복 입고 하교하는 청소년들의 표정에선 순진함이 완연하게 묻어난다. 알프스 농촌 산자락에 사는 아이들 느낌이다. 물론 전철을 타고 도시로 등교하거나 출근하는 전문직 청년들도 적지 않다.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퍼핑빌리 증기열차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퍼핑필리 증기열차

이 청정 지역은 벨그레이브, 레이크사이드, 멘지스, 젬부룩 등 다양한 공식 지명이 있지만 산촌 사람들은 속칭 ‘퍼핑 빌리(Puffing Billy)’라고 부른다. 파이프 담배 뻐끔거리는 동네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인데, 알고보니 이들 산촌마을 사이로 호주 개발시대에 중요한 재료인 목재와 주민들의 세간살이를 운반하는 증기기관차가 다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1900년에 달리기 시작한 이 목재운반 협궤열차는 1930년대 전성기를 맞고 이후 산업 대체재의 다양한 개발, 자연 보호, 수목 보호시대 본격화 등의 세태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1958년 폐쇄된다. 그리고 다 계획이 있었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1962년 부활한다.

제주 해녀의 숨비소리 혹은 타잔의 외침소리를 닮은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 전형적인 칙칙폭폭 열차 달리는 소리는 2023년 단데농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다.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승객들이 기관차 앞쪽으로 오는 이유는 사진촬영때문이다.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증기열차 출발전 기념사진 찰칵!

빅토리아 문화유산인 100년 된, 휘어진 목재다리 위를 달리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미국 서부개척시대 오렌지 특급열차의 모습은 이랬을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우리도 옛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이 멜버른 단데농 퍼핑빌리 증기열차(관광)의 특장점은 바로 창문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선반에 팔을 걸친 채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수 백명 여행객들의 탈랑거리는 다리 행렬 역시 장관이다. 1980년대 청량리에서 대성리, 강촌으로 MT 가던 만원 완행열차 풍경이 오버랩 된다. 좁은 의자에 8명이 앉아서 가야하니 콩나물 시루 같은 느낌인데, 미국, 일본, 브라질 여행객과 금새 친해지는 비결이다.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100년된 목재다리위를 달리는 퍼핑빌리 증기열차. 퍼핑은 증기가 뻐끔뻐끔 나는 모양새를 뜻한다.

한국인 일행과 잠시 무언의 의자 밀당을 펼치던 일본 여행객들에게 “일본 어디서 왔느냐. 한국엔 와봤느냐”라고 물으니 “한국 좋아한다, 다시 가보고 싶다”면서 한국에 대한 자신의 호감과 지식을 풀어놓았는데, 그렇게 언제 밀당했느냐는 듯 친해졌다.

기차가 곡선 주로를 달리면 사람도 기차도 단데농 산맥도 다 멋지고, 그 하모니는 하나의 풍경화가 된다. 제목 입은 역무원들은 모두 전직 철도원 혹은 주민으로, 현업에서 은퇴한 자원봉사자들이다. 열차가 좌회전하면 왼쪽 차창으로, 우회전하면 우측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승객들의 안전을 살핀다.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추억의 기차건널목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환송하는 퇴역 철도원 자원봉사자의 배웅

열차의 부활에는 자원봉사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빅토리아 철도 회사가 빈자리 티켓 비용까지 보전해줄 정도로 사양길에 접어들 무렵인 1955년, 이 열차에 정이 든 사람들이 퍼핑빌리 보존 협회를 결성해 미래에 대비했고, 마을 주민과 전직 철도 종사자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 폐선된 지 4년 만인 1962년(벨그레이프-멘지스크릭) 멜버른 메트로의 한 구간으로서 재개통됐다. 이때부터 관광 목적이 가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가는 레이크사이드역까지는 1975년에 개통되고, 주말에만 가는 젬브룩행 노선은 1998년에야 이어진다.

할아버지 시절, 산업용 목재 외에, 생활 물품과 세간살이를 열차에 실어나르며 삶을 윤택하게 일궈가던 추억을 싣고 청정 생태지대를 달리는 퍼핑빌리 열차의 인기는 2015년 이후에야 관광객 급증세로 나타났다. 아는 사람만 가던 현지인들의 전유물에서, 글로벌 인기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타기 어렵다.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레이크사이드역에 있는 증기열차 박물관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단데농 청정생태지역의 한가한 오리

관광용 증기열차 모델은 벌목 운반용의 기능을 마지막으로 수행한 1926년 연식(G클래스 Garratt)의 외관을 이용한다.

그리고 현대 기술을 접목해 성능을 유지 혹은 개선하되 옛 기능을 지키도록 세심하게 점검한다. 열차 출발 전 새벽 순회점검하는 것은 한 부지런한 역무원에 의해 생활화됐고, 종착역 레이크사이드에 도착하면 여러 직원들이 달려들어 엔진 상태 등을 세밀하게 확인한다.

비록 시속 20㎞로 24㎞를 달리는데 불과하지만, 역동적인 소리를 내고 달리니 진취적인 드라마의 타이틀 촬영지, 예능 또는 교육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이 열차 역시 빅토리아주 문화유산이다.

특별 프로그램 중에는 ‘오찬 기차 여행’, ‘저녁식사와 댄스를 즐기는 기차 여행’이 있고, 봄과 가을엔 꼬마기관차 토마스와 친구들 판토마임 공연(에메랄드 타운역), 재즈 공연 등도 열린다.

추억 싣고 숲속 질주 ‘퍼핑빌리 증기열차’ [함영훈의 멋·맛·쉼]
증기열차가 멈추고 레이크사이드역에 내리면 에메랄드 호수와 울울창창한 건강숲이 반긴다.

레이크사이드역에서 내려 단데농 산맥으로 접어들면 에메랄드호, 트레가노완호에서 노니는 오리와 강태공의 조화가 평화롭고, 울울창창한 숲이 청량한 피톤치트를 내뿜는다.

고단한 정착지 개척 끝에 19세기 호황을 맞아 더 바빠진 멜버른 시민들에게 단데농산은 좋은 탈출구였다.

단데농에서 차 한잔 마시는 것, 마가목·유칼립투스·양치식물 숲 산책, 자연 속 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 고사리협곡 탐방 등은 150년 전 멜버른 시민들에겐 큰 활력소였다고 한다. 요즘은 이것에 더해 자전거 하이킹, 산악 트레일, 호변 도시락 소풍 등을 다채롭게 즐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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