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까지 서울공예박물관서

‘의·표·예, 입고 꾸미기 위한 공예’

최경자·노라노·앙드레 김 등

1세대 디자이너 장인정신 재조명

1961년 서울안내지도, 명동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울시 제공]
1961년 서울안내지도, 명동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서울시 제공]

레이스로 지은 웨딩드레스, 섬세한 꽃 문양이 촘촘하게 자리잡아 청순한 느낌을 준다. 치마의 기장은 바닥까지 내려오지만, 신부가 걷기 편하도록 앞쪽이 살짝 짧다. 주름을 잡는 허리부분의 핀턱이 과하지 않아 정갈하다. 보트넥과 라운드넥 사이 적당히 시원해 보이도록 잡은 네크라인을 따라 작은 진주가 수놓듯 자리잡았다. 어깨를 살짝 가려주는 반팔 소매에도 진주 장식이 조르르 놓였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웨딩드레스다. 무려 1962년, 한국의 코코샤넬로 불리는 노라노(94)의 작업이다. 이 옷을 입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을 봄날의 신부가 떠오른다.

한국의 1세대 패션디자이너로 꼽히는 최경자·노라노·앙드레 김의 의상과 아카이브를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린다. ‘衣·表·藝(의·표·예), 입고 꾸미기 위한 공예’라는 주제로 세 디자이너의 장인정신을 재조명한다.

전시에서 만난 세 디자이너는 한국 패션계에서 그 역할이 각각 달랐다. 고(故) 최경자(1945-2010)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37년 한국 최초의 부띠끄 ‘은좌옥’을 열었다. 곧 이어 패션전문기관인 ‘국제패션스쿨’도 설립(1939)했다. 패션스쿨은 한국 패션디자이너의 요람으로 작동했다. 후세대 한국의 걸출한 패션디자이너로 꼽히는 진태옥, 트로아 조, 이신우, 이상봉 모두 이곳 출신이다. 최경자는 자신이 설립한 아카데미를 두고 “옷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옷 만드는 예술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왼쪽부터) 웨딩 드레스, 노라노, 1962/ 코트 드레스, 앙드레 김, 1980년대/ 타이 넥 드레스, 최경자 착용, 1981/ 이브닝 코트, 최경자, 1963.
(왼쪽부터) 웨딩 드레스, 노라노, 1962/ 코트 드레스, 앙드레 김, 1980년대/ 타이 넥 드레스, 최경자 착용, 1981/ 이브닝 코트, 최경자, 1963.

최경자가 교육자적 면모가 강했다면, 노라노는 1952년 명동에 샵을 내면서 국제양장사, 아리사양장점, 송옥양장점 등과 함께 주요 양장점으로 꼽히며 패션 대중화에 나섰다. 패션이라는 단어 조차 생소한 패션의 불모지였던 것. 그럼에도 개점 4년만에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다. 국내 최초의 패션쇼였다. 1959년엔 미국에서 열린 제 8회 미스 유니버스에 참가한 미스코리아 오현주의 퍼레이드 의상을 디자인했다. ‘아리랑 드레스’로 불리는 이 옷은 적색 양단으로 한복과 서양 드레스를 조화시킨 의상이다. 저고리를 벗으면 이브닝 드레스로 입을 수 있었다. 의상 덕이었을까. 오현주는 이때 인기상을 수상한다.

노라노는 “나는 옷을 통해 여성들이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고 말한다. 오트쿠튀르를 제작하면서 쌓인 신체 데이터로 기성복을 제작한 것도 이같은 철학의 연장선상이다. 뿐만 아니라 방적회사나 방모회사와 함께 소재개발에도 나섰고, 잠사 농가들과 함께 견직물을 생산, 결국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 프린트공장까지 세우게 된다. 한국 브랜드 최초로 미국 메이시스 백화점에 입점(1974)하는 등 해외로 수출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이같은 배경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고(故) 앙드레 김(1945~2010)은 최경자의 제자다. ‘국제패션스쿨’에서 수학 후, 1962년 ‘살롱 앙드레’를 설립했다. 1966년엔 파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하는 등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정부에서도 그의 업적을 인정해 금관문화훈장에 추서(2010)했다. 앙드레 김은 늘 한국이라는 컨텐츠를 해외에 알리고 싶어했다. 아들인 김중도 대표는 “본인의 작업에 영혼을 담고 혼신을 담아 표현하고 싶어했고, 이것을 알리고 싶어했다. 이를 통해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고 말한다. 대중적이고 실용적이거나 트렌드에 민감한 옷이 아닌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은 앙드레김의 트레이드 마크다. 일상의 옷이 아닌, 특별한 예술작품 혹은 공예작품 같은 오트쿠튀르가 그가 추구하던 패션이었다.

1961년 대한안내사에서 제작한 명동지도를 보면, 명동이 상상 이상으로 패션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명동2가를 중심으로 조훈양복점, 미미양장점 등 14개의 부띠끄가 운영되고 있었다. 1950년대 명동은 유흥과 예술이 넘치는 번화가였다. 당시 한 신문기사에서는 ‘한국의 유행은 서울에서 퍼지고, 서울의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한다’고 묘사했다.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문화와 사람들이 모이자 양장점들도 모였다. 직장 여성들이 양장을 위해 이곳을 많이 찾았고, 장사가 잘 될때에는 밤 새워 작업할 정도로 손님이 끊기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공예박물관, ‘衣·表·藝(의·표·예)’, 입고 꾸미기 위한 공예, 전시전경.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서울공예박물관, ‘衣·表·藝(의·표·예)’, 입고 꾸미기 위한 공예, 전시전경.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이렇듯 디자이너의 이름을 내걸고 한국 패션 정점을 구가하던 양장점도 1970년대 들어 쇄락한다. 1970년대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섬유와 의류산업을 키웠던 시기다. 전략적 경제개발 성과로 수출액이 100달러를 달성했고, 덕분에 덩치가 커진 섬유수출 기업들이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었다. 소비자입장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의복의 종류와 범위가 확대됐다. 새 옷을 장만하려면 양장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백화점으로 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춘 대기업의 고급 기성복들은 빠르게 시장을 잠식했다. 신문과 잡지, 흑백TV 등 대중매체에서 해외 패션 정보를 상대적으로 쉽게 취득할 수 있었고, 당시 전세계적 유행이던 미니스커트와 청바지도 국내에 바로 상륙했다. 이같은 사회 변화에 1979년, 명동 대표 양장점 ‘송옥양장점’이 도산하며 양장점이 점차 퇴조한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서는 기성복 시대로 전환한다.

샤넬이나 디올, 루이비통과 같은 글로벌 명품 패션하우스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국내의 역사적 전통이 있는 패션하우스들이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것은 이같은 경제구조의 변화가 가장 크다. 개인 부띠끄가 막 규모를 키워가며 기업으로 성장할 시점에 기성복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시장 이분화가 아닌 시장 교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승해 서울공예박물관 학예사는 “기성복 시대가 도래하면서 양장점들이 위축된 부분이 가장 크다. 또한 해외 패션하우스와 주요한 차이는 창업주의 가치관을 이어받아 디자인을 이어가는 수석디자이너 체제가 없었다. 제자들을 키우긴 했지만 물려준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모두 독립해서 브랜드를 런칭했다”고 분석한다.

압축과 고도성장 끝, 남은 것은 박제된 레거시다. 그나마도 세 디자이너는 브랜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초창기 옷이나 아카이브가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양장점만 수 백, 디자이너는 수 천 명이다.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전시장의 옷을 보면, 분명 지금 입어도 손색없는 디자인들인데도 유물처럼 느껴진다. 불과 100년도 안되는 시간차 인데도 사진과 신문기사만이 과거의 영광을 증명한다. K팝에 이어 K패션이 세계를 호령하는 지금, 1세대 디자이너들의 레거시가 이어질 방법은 없을까. 전시는 4월 2일까지 이어진다.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