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제 정세는 경제와 안보, 이중 헤게모니의 각축장이다. 두 요소가 동반하기도 하지만 경제가 국가안보를 압도하거나 국방이 경제를 압박하는 등 갈등을 빚기도 한다. 과거 세계열강들은 단일 헤게모니의 시각에서 세계 주도권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식민 점령의 시대에서는 거대 식민지의 획득 여부가 가장 중요했고, 이념 경쟁의 냉전 시대에서는 이른바 자유와 공산 이념의 전략적 지배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국제적 헤게모니가 여전히 중요하나 국방안보와 경제가 헤게모니의 전략적 두 축으로 작용하는, 이를테면 ‘듀얼 헤게모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는 국제적 전략 기준으로 약하고, 국제적 교류와 소통은 의미가 거의 없다.
국제 외교도 이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외교에서 안보와 경제는 중요하지만 문화는 큰 역할을 하지 않고, 소통과 교류는 순위에 있지도 않은 듯하다. 소통은 없고 이해득실만이 국제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국가 간 안보와 경제만이 국제관계의 핵심이라면 굳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안보와 경제담당관이나 영사를 두면 충분하다. 하지만 외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외교는 자기 목적만을 추구하는 기술이 아니라 소통과 목적을 동시에 이루는 지속적 종합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누군가 통로를 막고 있으면 요즘은 흔히 ‘지나갈게요’라는 말을 하고 지나간다. 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나 ‘실례지만 지나갈게요’라는 말을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전자가 기술이라면 후자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만족하는 문화적 전략이다. 외교에 문화와 소통이 필요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만약 통로를 막고 있는 사람을 말도 없이 밀치고 가거나 무기를 보여주며 물러설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목적을 위한 폭력일 뿐이다. 국제관계에서 전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렇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가장 지속성이 없는 수단이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 문호 괴테 역시 바이마르공국에서 외교관 일을 했다. 당시 바이마르공국의 자치령이었던 아이제나흐지역을 제외하면 12만명 남짓 인구의 조그만 나라에서 무슨 외교가 필요했는지 의아한 사람도 있겠지만 작은 나라일수록 외교는 생존의 필수 전략이었다. 흔히 괴테가 예술가로 다시 태어난 계기로 과장되게 알려진 이탈리아 여행에서도 그는 비밀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유럽의 큰 나라도 다르지 않았다. 베를린의 전통 대학인 훔볼트대학은 쉴러와 괴테로부터 사사한 빌헬름 폰 훔볼트가 인문 이념으로 설립한, 대표적 프로이센 대학이다. 그도 프로이센의 외교관으로 로마와 빈 등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당시 프로이센의 국제적 생존과 발전은 훔볼트가 보여준 외교 역량의 연장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최근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 및 안보 패권다툼은 국제적 외교 부재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등처럼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의 안위와 발전을 가져오는 진정한 외교의 전략이 더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 정부는 지금 종합적 전략의 국제 외교를 펼쳐야 하며, 모든 외교관은 그 사명과 임무를 느껴야 한다.
조우호 덕성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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