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글로벌 자본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큰손’ 투자자들의 지난해 4분기 주식 거래 내역이 공개됐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정기 제출한 자료를 통해서다.
가치투자의 창시자로서 ‘장기 투자’로 유명한 워런 버핏이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 주식을 사들인 지 한 분기 만에 대부분 처분하는 ‘단타’ 거래에 나섰다는 사실에 전 세계 투자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국내에서 ‘돈나무 언니’로 불리는 캐시 우드와 ‘헤지펀드 대부’ 조지 소로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등이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에 대한 ‘저가 매수’에 나섰고, 영화 ‘빅쇼트’의 주인공 마이클 버리는 중국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베팅하는 모습을 보였다.
버핏, 매입 한 분기 만에 TSMC 지분 86.2% 매각
‘오마하의 현인’ 버핏은 평소 지론과 180도 다른 투자 형태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4분기 TSMC 보유 지분 중 86.2%(5180만여주)를 매각했는데, 이는 매입한 지 불과 한 분기 만에 매입 주식 대부분을 팔아치운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 버핏은 ‘장기 투자’의 중요성에 대해 입버릇처럼 말해온 바 있다.
버핏의 이 같은 행동의 배경엔 전 세계 반도체 수요 둔화에 따른 주가 약세에 대한 우려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TSMC는 반도체 수요 둔화로 올해 1분기 매출이 5% 감소할 것이라는 실적 전망을 내놓은 상태다.
CFRA리서치 애널리스트 캐시 시퍼트는 “버크셔해서웨이는 TSMC로 적은 이익을 거뒀다”면서 대략 68.5달러에 매수해 74.5달러에 팔았을 것으로 추산했다. 이 계산에 따르면 버크셔해서웨이의 TSMC 시세차익은 3억1080만달러(약 3970억원) 수준이다.
버크셔해서웨이는 지난해 4분기 US뱅코프(-91.4%) 등 은행주 비중도 줄였고, 액티비전 블리자드·셰브런 등의 지분도 팔았다.
이런 와중에도 버핏의 애플 사랑은 또다시 이어졌다. 32억달러(약 4조892억원) 어치인 2080만주를 추가 매입했기 때문이다.
월街 큰손들, 테슬라 ‘저가 매수’에 공격적 베팅 한마음
지난해 4분기 주가가 급격히 떨어지며 ‘백슬라’까지 위협받았던 테슬라 주식에 대해 큰손들은 과감히 거액을 투자했다. 미래 가치가 충분하다 판단되는 종목의 많은 주식을 싼 가격에 사들일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이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는 이 기간 기존 보유량보다 270%(24만2399주) 많은 테슬라 주식을 매입했다.
중국 시장 등에서 판매 부진을 겪을 때도 테슬라가 타사 전기차와 비교할 수 없는 기술적 우위를 갖고 있다며 ‘일편단심’을 이어갔던 우드의 아크인베스트먼트도 작년 4분기 54만4555주에 이르는 테슬라 주식을 추가 매수했다.
여기에 블랙록 역시 테슬라 주식 587만5000주를 사들이며 저가매수 대열에 합류했다.
소로스와 우드는 최근 전기차 라인업 확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제너럴모터스(GM) 주식도 각각 50만주, 10만6576주 사모았다.
이 밖에도 소로스와 우드는 화상회의 업체인 줌 주식을 매도하는 데 뜻을 함께하기도 했다.
블랙록, 기존 보유량 2.4배 쿠팡 주식 매입
다른 종목 투자에서 소로스, 우드, 핑크는 각자 다른 전략을 선보였다.
우드가 이끄는 아크인베스트먼트는 보유한 엔비디아 주식 중 62%에 이르는 85만9443주를 매도했다. 작년 4분기 중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엔비디아 주가는 올해 초반 대화형 인공지능(AI) 챗봇 ‘챗(Chat)GPT’ 열풍을 타고 60.5%나 상승한 바 있다.
‘월가(街)의 제왕’ 핑크가 이끄는 블랙록은 지난해 3분기에 이어 2분기 연속 흑자를 거둘 것이란 기대감에 쿠팡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작년 4분기 블랙록이 추가 매입한 쿠팡 주식은 704만7491주로 전분기(292만8258주) 대비 241%나 많은 수준이다.
여기에 블랙록은 애플(+896만주), 아마존(+1259만주), 마이크로소프트(MS-+1320만주), 구글(+447만주) 등 전통적인 ‘빅테크’ 종목을 차곡차곡 사들였다.
주식 ‘약세론→상승론’ 대세 갈아탄 ‘빅쇼트’ 버리
마이클 버리가 이끄는 사이언자산운용은 작년 4분기 중국 빅테크 업체인 알리바바(5만주·440만달러)와 징둥닷컴(7만5000주·420만달러)을 매수했다. 중국 정부의 상장·투자 제한 조치로 낙폭이 컸던 종목들에 대해 공격적인 저가 매수에 나선 셈이다.
여기에 글로벌 호텔 체인인 MGM리조트인터내셔널(10만주)과 미국 항공사인 스카이웨스트(12만5000주) 등 리오프닝 관련주를 대거 매입했다. 그동안 포트폴리오에 없던 신규 매수 종목들이다. 전 분기 대비 7개 종목을 신규 매수한 버리의 태세 전환을 두고 월가 전문가들은 최근 1년 간 트위터를 통해 연일 펼쳤던 주가 약세론을 접고 상승세에 베팅을 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투자전문매체 배런스는 “대형 투자업체들의 분기 신고 자료는 늦게 공개된다는 점에서 당장의 상황을 보여주지 못할 수는 있다”면서도 “대체적인 투자 트렌드는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KIC, ‘에너지·전기차’ 사고 ‘빅테크·TSMC·차량 공유·금융’ 팔아
한편, ‘K-국부펀드’ 한국투자공사(KIC)는 작년 4분기 마라톤오일(+59만4407주), 옥시덴탈페트롤리움(+47만6815주), 코테라에너지(+23만498주) 등 에너지 관련 기업 주식을 대량 매입했고, 테슬라(+26만2322주), GM(+44만561주), 스텔란티스(+41만5097주) 등 전기차 관련 주식 역시 사모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애플(-146만8594주), 아마존(-111만6717주), 메타(-46만999주), 알파벳(-44만1248주), 마이크로소프트(-66만440주) 등 전통적인 빅테크 주식에 대해서는 보유 지분을 내놓았다. 트위터에 대해서는 갖고 있는 주식 7만7955주를 모두 팔았다.
TSMC에 대해서도 KIC는 보유 주식 6만1635주를 전량 매각했다.
이 밖에도 차량공유(그랩·리프트), 금융(UBS·씨티그룹·JP모건·모건스탠리·비자) 종목에 대해서도 매도세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