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반도체법·칩4·수요둔화 등 ‘삼중고’
‘가격·성장·설비’ 삼박자 ‘암울’
[헤럴드경제=문영규·김지헌 기자]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계가 업황 둔화와 미국의 경제외교 정책, 반도체 지원법 때문에 ‘삼중고’에 빠져 고심 중이다. 고속성장을 이어오던 업황은 하반기부터 전망이 밝지 않다. 미중 갈등 속에서 미국의 ‘반도체 드라이브’는 공급망 재편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다.
▶美 반도체법·칩4에 정부·기업 대책마련= 산업통상자원부는 이창양 장관 주재로 25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반도체·자동차·배터리 업계 간담회’를 열고 업계와 미국의 ‘반도체 및 과학법(반도체지원법)’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자리에는 박학규 삼성전자 사장, 김동섭 SK하이닉스 사장,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등이 참석해 민관합동대응반 구성, 아웃리치(접촉·설득) 등을 통해 대응키로 했다.
반도체 지원법은 미국 내 반도체 신규투자에 대해 투자세액공제 25%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지원을 받은 기업은 ‘가드레일 조항’에 따라 향후 10년 간 중국과 같은 우려 대상국의 신규 투자가 제한된다.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계획하면서 중국에도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세제 지원을 받고 중국 시장 투자 제한을 받느냐, 지원을 받지 않고 중국 설비를 유지하느냐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미 정부와 논의를 통해 지원을 받으면서도 투자 제한을 피할 수 있도록 하는 묘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 주도로 한국, 일본, 대만이 참여하는 ‘칩4(팹4)’ 협력도 수교 30년을 맞는 중국과의 관계를 냉각시키고 있다. 미국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칩4에 참여할 수 밖에 없지만 중국이 배제된 칩4도 단기적으로는 외교·경제적 위험부담이 크다는 지적이다. ‘상업적 자살’이라는 표현에서 수위는 다소 낮아졌고 보복조치를 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지만 중국은 여전히 대미 외교에 자주성을 가지라며 압박하고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우려했던 반도체 등 첨단산업부문에서는 글로벌 공급망의 이분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신공급망을 둘러싼 미-중간 신냉전 분위기 격화 속에 한-미간 그리고 한-중간 교역구조의 변화 가능성 및 마찰 리스크가 동시에 커졌다”고 분석했다.
암울한 시장 성장률은 기업들의 근심을 더하고 있다. 경기위축으로 전방산업 재고가 축적된 상태에서 제품 수요가 줄며 가격은 점점 하락세다. 생산을 줄이면 경쟁사에 점유율을 뺏기고 오히려 손실이다. 가격하락을 감수해야 하니 수익성은 점차 나빠진다. 수요전망이 좋지 않아 추가적인 설비투자도 고민된다. IC인사이츠도 내년 반도체 설비투자(CAPEX) 감소를 전망했다.
▶‘가격·성장·설비’ 암울…수요둔화의 악순환=대만 시장조사업체인 트렌드포스는 24일 수요 부진과 공급 과잉의 영향으로 3분기 낸드플래시 가격이 2분기보다 13~18%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달 3분기 낸드플래시의 가격이 8~13% 내릴 것으로 전망했는데 한 달 여 만에 하락폭을 더 키운 것이다. 올해 이미 D램은 가격 하락전망이 잇따랐다.
트렌드포스는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으로 세계 경기가 약화됨에 따라 다양한 소비자용 기기 수요가 2분기 이후 낮아졌다”며 “서버 수요는 안정적이지만 재고 조정 탓에 공급 과잉이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품목별로는 내장형멀티미디어카드(eMMC)와 범용플래시저장장치(UFS)의 가격이 3분기에 13~18% 하락할 전망이다. 기존 하락 전망치는 8~13% 수준이었다. 기업용과 소비자용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 가격은 10~15%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성장률도 암울하다. 최근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 발표한 세계 반도체 시장 전망치를 보면, 올해 메모리 시장 성장률은 8.2%다. 6월 공표한 전망치(18.7%)보다 10.5%포인트 낮아졌다. 두 달만에 전망치가 대폭 낮아진 것이다. 지난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 성장률은 30.9%를 기록했다. 내년엔 더 하향된다.
WSTS는 2023년 메모리 시장 성장률을 0.6%로 예측했다. 모든 지역과 분야별 전망 중 유일하게 0%대에 진입한다.
IC인사이츠는 내년 반도체 설비투자가 올해보다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올해 전세계 반도체 시장 설비투자 규모는 1855억달러(약 249조원) 수준으로 지난 3월 예상치인 1904억달러 보다 낮았다. 올해 설비투자 증가율은 21%로 지난해 35%에 비해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