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비아 토네이도

[헤럴드경제=오상현 기자] 1960년대 유럽, 전쟁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지 10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세계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뉜 채 또 다른 긴장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같은 유라시아대륙으로 묶인 러시아의 군사력 확충은 유럽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죠.

앞서 여러 무기큐브 시간에 언급했지만 소련은 1949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고 1957년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마쳤습니다.

더 높은 고도에서 정찰을 하기 위해 만들었던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의 지대공 미사일에 맞아 격추됐던 것도 바로 옆에서 목격했죠.

유럽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소련의 방공망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

당시 서독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등 유럽대륙의 국가는 미국의 F-104 스타파이터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마하2의 빠른 속도로 제공권을 장악하기에는 손색이 없었던 스타파이터는 적의 전투기를 막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적이 탄도미사일 등으로 공격을 했을 때 반격할 수 있는 카운트어택 전력으로는 쓸 수가 없었죠.

파나비아 토네이도

1968년. 서독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캐나다 등 5개국은 스타파이터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신형 전투기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목적 항공기(MRA)로 시작했지만 각 나라의 요구사항이 추가되면서 다목적 전투항공기(MRCA)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때마침 대표적인 핵 투발수단인 아브로 볼칸과 블랙번 버캐니어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의 F-111을 도입하려다가 취소한 영국도 공동개발 소식을 듣고 가담했습니다.

이때 영국은 3년전 프랑스 닷소사와 공동개발하려다 좌초됐던 AFVG 가변익 항공기의 연구 성과도 함께 들고 왔죠.

파나비아 토네이도

이렇게 1968년까지 공동개발을 하겠다고 했던 6개국의 예상 구매 대수는 무려 1500대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조별과제가 언제나 원활할 수 없듯이 이들의 협력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벨기에는 프랑스로부터 미라주5 판매 제안을 받으면서 사업에서 빠졌고 캐나다도 서유럽 위주의 전투기 개발이 자기들과 맞지 않다며 공동개발 의사를 철회했습니다.

결국 1969년 3월 26일 영국과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4개국이 공동개발을 확정하면서 독일 바이에른 주의 할베르그모스에 본사를 둔 합작회사 파나비아 항공기 주식회사가 설립됐습니다.

1년여 간 논의를 지속했던 4개국 중 또 하나의 이탈자가 생겼습니다.

더 간단하고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항공기를 원했던 네덜란드는 1970년 파나비아의 개발 방침이 자국 공군 요구도에서 멀어지자 컨소시엄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게다가 1972년에는 서독이 항공기 수량을 600대에서 324대로 줄이면서 자칫 판이 깨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습니다.

결국 영국과 서독은 각각 42.5%의 지분과 작업량을 맡고 이탈리아가 15%를 맡기로 하고 프로젝트는 이어졌습니다.

파나비아 토네이도
파나비아 토네이도

그런데 특이한 건 지분만 각각 나누고 공동으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동체를 나눠서 각자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겁니다.

동체 앞부분과 꼬리는 영국이 중앙동체는 서독이 맡았고 이탈리아는 날개 제작을 맡았죠.

엔진은 터보 유니온이라는 별도의 다국적 회사를 설립해 RB199라는 엔진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소유권은 롤스로이스와 MTU가 각각 40%, FIAT가 20%를 차지했습니다.

한 회사에서 나란히 세워놓고 만들어도 잘 될 수 있을지 모르는 프로젝트를 파나비아는 해냈습니다.

1974년 8월 14일 독일 만칭에서 초도비행에 성공했고 1976년 7월 생산 계약 체결 이후 본격 생산에 들어가 1979년 독일 공군에 첫 납품을 했습니다.

파나비아 토네이도

이쯤에서 제원을 살펴보겠습니다.

2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는 토네이도는 길이 16.72m, 높이 5.95m, 날개는 가변익을 최대한 펼쳤을 때 13.91m, 접었을 때는 8.6m입니다.

자체중량은 1만3890㎏, 최대이륙중량은 2만8000㎏이고 9800파운드급 엔진 2개를 장착했습니다.

애프터버너를 작동하면 1만7300파운드의 추력을 낼 수 있죠.

최대속도는 마하 2.2, 전투행동반경은 무장탑재나 임무에 따라 926㎞~1574㎞이고 최대항속거리는 외부연료탱크 4개를 장착했을 때 3890㎞까지 나옵니다.

무장은 180발을 발사할 수 있는 27㎜ 리볼버 캐논이 장착되고 동체 아래 3개, 날개에 4개의 하드포인트가 있어서 AIM-9 사이드와인더와 AIM-132 암람 등 공대공 미사일은 물론 500파운드에서 2000파운드급까지의 다양한 페이브웨이 공대지 폭탄, AGM-65 매버릭 미사일과 타우러스나 스톰 쉐도우 같은 순항미사일까지 장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많은 탄으로 활주로를 파괴할 수 있는 JP233이나 MW-1 확산탄을 저공비행을 하면서 떨어트려 적 공군기지를 초토화할 수 있고 B61이나 WE177 전술핵무기 4발을 장착해 유사시 적진에 저공으로 침투해 핵폭탄을 떨구고 복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습니다.

파나비아 토네이도

구조적 특성이나 무장의 장착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토네이도는 적의 방공망을 저공으로 침투해 적진에 재래식 무기나 핵무기를 투하하는 것을 기본으로 설계됐습니다.

가변익 날개를 최대한 접으면 고속 저공비행을 하는데 유리하고 넓게 펼치면 이착륙거리를 줄일 수 있죠.

게다가 전투기에서는 좀처럼 채택하지 않는 엔진 역추진 장치까지 더해져 착륙 거리를 최대로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굴뚝청소하고 나온 청소부처럼 수직꼬리날개 아래쪽에 그을음이 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어쨌든 임무수행에는 적합했습니다.

또 당시 F-16 등 일부 항공기만 채택했던 디지털 비행제어 시스템, 즉 플라이 바이 와이어를 탑재해 조종사의 임무부담을 최소화했죠.

다른 전투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외부 하드포인트의 특징도 있습니다. 날개를 접고 펴는 각도에 따라 무기 파일론의 각도도 비행방향을 향하게 자동으로 바뀌도록 한 것이죠.

때문에 가변익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다양한 무장이나 외부 연료통 등을 자유롭게 장착할 수 있습니다.

파나비아 토네이도

토네이도는 1979년부터 1998년까지 19년에 걸쳐 992대가 생산됐습니다.

공동개발을 했던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외에 사우디아라비아가 120대의 토네이도를 도입했죠.

형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공중차단과 지상타격을 주임무로하는 토네이도 IDS, 주로 영국에서 운영된 항공기로 GR1과 GR4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토네이도 ECR은 전자전과 방공억제 임무를 수행했고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운용했습니다.

또 토네이도 ADV는 방공형으로 이탈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운용했죠.

실전투입 경험도 다양했습니다.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 이라크전과 리비아 내전, 아프가니스탄과 예멘, 시리아에서도 역할을 했죠.

물론 걸프전 당시 영국 공군에서 6대, 이탈리아 공군에서 1대 등 다국적군 전술기 중 가장 많이 손실된 기체로 약간의 불명예를 얻긴 했지만 단순히 기체가 좋고 나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공침투라는 교리와 비교적 위험한 임무에 투입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명예를 회복하기는 했습니다.

토네이도는 2019년 퇴역할 때까지 40년 동안 유럽의 영공을 지켰습니다.

물론 구조가 복잡해서 정비하기에 힘들고 운영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가변익 항공기의 한계가 많이 있었지만 유로파이터와 F-35 등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죠.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한다는 공동의 목적으로 시작된 토네이도 개발은 공동의 목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개발 국가가 6개국에서 출발해 3개국만 남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했습니다.

하물며 목적이 같은데도 이렇게 어려운 것이 공동개발인데 개발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묶인 공동개발의 끈은 더욱 느슨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비단 KF-21뿐 아니라 다른 무기체계를 공동개발로 하려할 때 꼭 생각해 봐야할 포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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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럿= 기자 오상현 / PD 박정은, 우원희, 김정률, 김성근 / CG 임예진, 이윤지 / 제작책임 김율 / 운영책임 홍승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