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에리크 스베토프트 지음,홍재웅 옮김, 교양인)=북유럽 최고급 스파 호텔에서 벌어지는 섬뜩하고 기이한 사건을 그린 호러 그래픽노블. 뛰어난 시설로 유명한 스파 호텔에 일상의 찌든 삶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기며 에너지를 재충전하려는 이들이 들어온다. 백인 부자와 신혼부부, 회사원 등 투숙객들은 다양하다.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쾌적함을 선사하기 위해 청결에 온 힘을 쏟는데, 어느 날 스파 여기저기에서 정체 모를 검은 곰팡이가 퍼지는 걸 발견한다. 직원들은 곰팡이를 없애려 애쓰지만 더욱 기세 좋게 뻗어나간다. 투숙객들도 곳곳에서 이상한 존재를 목격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VIP 투숙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제 살아 움직이는 괴물이 된 스파 안에서 투숙객들은 길을 잃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스파 호텔에 있는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연수차 호텔을 방문한 회사원은 직장 동료에게 이유 없이 무시 당하고 호텔 사장은 상납금을 요구하는 폭력배 때문에 힘들어한다. 사람들의 이런 부정적 감정은 곰팡이를 만들어내고 괴물을 불러낸다. 현실의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텔을 찾지만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미로 같은 복도를 뱅뱅 돌거나 환영에 시달리다 얼굴 없는 시체로 변해버린다. 치유와 휴식의 공간이 저주 받은 공간이 된 것이다. 작가는 스파 호텔을 뒤덮는 습기와 곰팡이, 진액을 얽히고 설킨 여러 선으로 그려 사람의 혈관처럼 표현한다. 인물들의 부정적 감정이 극심해질수록 신체는 기괴하게 변현된다. 사회 비판과 실존의 문제를 그로테스크하게 담아낸 묵시록적 작품이다.

▶바다의 긴 꽃잎(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민음사)=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아옌데의 칠레의 현대사를 그린 최신작. 스페인 내전을 겪은 주인공들이 파시즘의 광풍을 피해 칠레로 망명, 그곳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담았다. ‘바다의 긴 꽃잎’은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언젠가 칠레’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하얗고 새까만 거품을 허리띠를 두르고,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이뤄진 기다란 꽃잎’이란 시구다. 네루다 시인과 작가 아옌데의 칠레를 가리킨다. 작가가 밝힌 대로 소설은 실존 인물 빅토르 페이 카사도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에 허구의 이야기를 교직해 그려냈다. 여기에는 피노체트 군부독재를 피해 베네수엘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도 들어있다. 1938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인 카탈루냐 지방. 의대생 빅토르 달마우는 전장에서 이송되는 군인들을 치료하며 밤낮 없이 바쁜 날을 보낸다. 그러나 내전의 승리는 요원해 보이고 음대 교수인 아버지와 동생 기옘이 전쟁 중에 숨을 거두게 된다. 빅토르는 누이동생과도 같은 기옘의 아내 로세르와 어머니, 동료 아이토르의 피난을 돕고 헤어지는데 수용소에서 다시 만나 칠레행 위나펙호에 오른다. 작가는 특히 고난의 역사를 버티게 하는 사랑과 우정, 연대에 주목한다. 숨통을 죄어오는 파시즘을 피해 칠레로 망명해야 했던 2천여 명을 오로지 형제애로 환대한 스페인 영사 파블로 네루다와 칠레 국민들, 망명객으로 칠레로 건너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피노체트 군부의 쿠데타와 독재에 맞서 다시 싸움에 뛰어든 주인공 빅토르의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살려낸다.

▶여성 선택(마이케 슈토베로크 지음,이미옥 옮김, 에코리브르)=문명이 농경생활과 정착에서 시작됐다는 건 상식이다. 농사짓기는 여성을 집안으로 불러들였고 대외 활동에서 배제시켰다. 이어 생겨난 문명은 오로지 남자가 남자를 위한 사회구조를 구축하는 작업이었다고 슈토베로크는 역설한다. 농업과 이에 따른 재산의 축적은 남자에게 섹스라는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고, 여성은 집 안에서 육아에 전념케 함으로써 공공 영역 진출을 막았다. 피임이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와 자손을 만들지 결정권은 남자에게 속하게 됐다. 자연에서 여성이 어떤 남자를 택할지 결정하던 수 백만 년 이어져온 생물학적 원칙, 여성 선택이 뒤집힌 것이다. 이런 남성 중심 문명에 균열이 생긴 건 피임이 가능해진 데 있다. 저자는 피임약을 통해 여자가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임신을 스스로 통제하면서 남성 위주의 시스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며, 현재 전 세계적인 성 갈등은 일방적 문명에 억눌렸던 사람들의 청산작업이며, 남자에게는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는 진화생물학적 사실은 남자가 만든 문명을 통해 악용된 사실과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차이에는 선악이나 흑백, 옳고 그름이 없기 때문에 가치 중립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순수한 형태의 여성선택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남자의 욕구와 여자의 욕구를 동일하게 고려하는 새문명을 제시한다. 그러러면 문명의 기초들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책은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 갈등과 현상의 이면을 이해하는 틀을 제공한다.

이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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