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포통장 : 공범이 된 청년들] - 프롤로그
“아버님, 저도 여러 번 전화했는데 다원(가명)이가 안 받네요.”
막역한 친구의 전화도 받질 않았다. 아버지 김정길(64·가명) 씨는 이미 수십번 전화를 했던 터였다. 응답 없는 전화. 아들이 사라졌다. 보이스피싱 공범 혐의로 열릴 재판을 열흘쯤 앞둔 올해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이 혼자 살던 경기도 고양의 원룸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다. ‘얘가 혹시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무서운 생각이 김씨의 머릿속에 번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2월 말 경상북도 상주의 어느 편의점에서 담배와 딸기우유를 산 기록이 남았다. 상주는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곳이다. 온 가족이 상주를 뒤졌지만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3월 11일 경찰에 실종 신고를 냈다.
피 말리는 시간들. 4월 말에서야 아들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상주에서도 주민이 가장 적은 하북면의 어느 터널 바깥에 방치된 자동차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수습됐다. 이상하게 여긴 등산객이 경찰에 신고했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향년 39세.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들의) 존재가 없어지니 미치겠더라고요. 스스로 터널을 빠져나와야 했는데 재기하기를 바랐는데….”
김씨는 북받치는 감정을 다스렸다. 선뜩한 기억이 들 때마다 말이 떨렸다. 유일한 아들을 먼저 보낸 충격은 그대로였다. 서울에서 개인택시를 모는 김씨는 처음 취재진이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거절했다.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가 설득했고 9월 초와 이달 초, 2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들려줬다.
보이스피싱 수거책
아들은 자동차를 무척 좋아했다. 뒤늦게 정비를 배워 정비센터에 자리를 얻었다. 사고차가 입고되면 견적 내고 수리 절차를 밟는 업무를 했다. 그러면서 돈이 모이는 대로 차를 튜닝하는 걸 취미 삼았다.
정비센터에서 10년을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도 하나 낳았다. 하지만 부부 사이가 나빠지며 2년 만에 갈라섰다. 엄마가 양육권을 가져갔다. 홀몸이 된 아들은 고양에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아버지는 지난해 초부터 아들에게서 “힘들다”는 말이 부쩍 잦아졌다고 기억했다. 소위 갑질하는 손님을 대하는 게 점점 힘에 부친다고 했다. 입 주위가 허는 날이 잦았다. “경험이 10년 됐지만 그런 손님들은 좀처럼 소화를 못 시키는 것 같았어요. 부자끼리 대화도 많이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는 모양이더라고요.”
“아버지, 아르바이트 찾았어요. 일단 알바 좀 하면서 지낼게요.”
아들은 결국 정비센터를 관뒀다. 여덟 살 손주의 양육비를 대야 했기에 쉴 틈은 없었다. 서둘러 새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더니 알바를 하나 잡았다고 했다. 배송업무라고 얘기했다. 마트 가서 식품 사다가 배달하고 법원에서 서류 받아다가 배송해주는 일이었다.
“며칠 그렇게 하다가 송금하는 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회사에서) 제안을 했더래요. 일감이 많다면서요. 아들이 ‘돈세탁인가’ 의심이 들어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하고 물었대요. 그러니 ‘아무 문제 없다. 문제 생겨도 우리가 책임진다’고 대답했다는 거예요.”
‘CCTV가 천지인데 설마 잘못된 걸 시키겠나.’ 아버지 김씨도 제2금융권에 관계된 업무겠거니 생각했다. “아들도 성인이니까요. 그저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해봐’라고만 했어요.”
부자(父子)의 동행
“손님도 요새 별로 없을 텐데 아버지 택시로 같이 다닙시다. 일하면 일당 바로 줘요.”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해지며 택시 영업이 어렵던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옆자리에 아들을 태우고 고객을 만난다는 장소로 운전했다. 가장 멀리 간 곳은 원주였다. 부자의 동행은 보름쯤 이어졌다. 그리고 이 여정은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15~20일쯤 같이 다닌 것 같아요. 한 번은 같이 나갔는데 1000만원 정도를 받아오더라고요. 자식이 아버지에게 나쁜 일 하자겠어요. 그냥 그렇게 된 거죠.” 그러면서도 김씨는 ‘죄스럽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느 날 형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들이 ‘그 일’을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난 때였다.
“OOO라는 곳에서 사람 만나서 돈 받는 손님을 태운 적 있습니까? 김다원이란 사람인데 선생님 택시를 탄 것 같아서요.”
“아…. 제 아들입니다.”
“보이스피싱이에요 그거. 빨리 연락해야 합니다.”
경기도 시흥, 서울 강동·용산 등 각지에서 피해 신고가 잇따랐다. 김다원 씨는 지난해 8월 서울 강동·중랑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수금이란 건 사실 보이스피싱 피해금이었다. ‘대면편취’라는 신종 수법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아들은 20여회 피해자를 만났고 피해금은 1억5000만원에 달했다.
피의자 심문조서 기록은 건조했다. 10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기까지의 고민과 좌절, 밥벌이의 어려움 따위는 담기지 않았다. 한동훈 중랑서 형사과장은 “줄곧 자기는 몰랐다고 소명했고 너무 많은 돈이어서 욕심도 좀 났다는 진술도 있다. 기록상 특별한 건 없다”고 말했다.
선량한 30대 청년은 하루아침에 피의자가 됐다. 경찰은 지난해 9월 사기 혐의로 그를 검찰에 송치했다. 그는 한동안 정보를 긁어모으는 데 몰두했다. 알바인 줄만 알았다가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으로 몰린 어떤 이가 재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하기도 했다.
“공판 앞두고 너무 괴로웠던 거예요. 괴로워하다가 다 짊어지고 가겠다고 선택한 거죠. 저하고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잊으면서 살고 있어요. 지금 일을 하니까 일하는 시간 동안은 가슴에 묻고 살아갑니다. 혹시 모르고 이런 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이나 어디에 문의해보고 확인해보면 좋겠어요. 그게 최선인 거 같네요.”
[헤럴드경제 디지털스토리텔링 : 인간 대포통장] 졸지에 사기범죄의 ‘공범’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나 수백~수천만원의 현금다발을 받아 어딘가로 입금했습니다. 수사기관은 그들을 ‘현금 수거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총책과 범행을 공모했단 죄를 묻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는 102명의 보이스피싱 공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15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이 범죄자로 연루되기까지의 배경, 어떻게 일했고 붙잡혔는지를 파악했습니다. 대부분은 가짜 취업공고에 속아 ‘그 일’에 엮였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취업준비 기간을 보내던 청년, 코로나19로 일터에서 밀려난 구직자, 단지 세상경험 쌓으려 알바를 찾았던 대학생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거미줄에 걸려 들었습니다. 피해자와 사회는 그들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범죄인 걸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설계자들이 짜놓은 판은 지독하리만큼 교묘합니다. 피해자들을 감쪽같이 속이듯이 자기들의 수족 노릇을 할 사람도 철저히 기망합니다. 정작 보이스피싱 본체는 막대한 수익만 삼키고 법망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공범이 된 이들의 허물 없음을 대변하려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는 한순간에 피해자-피의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기록입니다. 동시에 보이스피싱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을 비난하고 강하게 처벌하는 게 최선인지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헤럴드경제의 ‘인간 대포통장’ 기획은 15일부터 3부에 걸쳐 보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