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레버넌트]
‘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됩니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XX의 아들, 보잘것없는 놈, 찢어지게 가난한 놈”
소재원 작가는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영화 ‘비스티보이즈’의 원작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로 유명 작가 반열에 올랐다. 탄탄대로 인생을 살아왔을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 소재원(40) 씨의 어린 시절 별명은 ‘가난’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불행이 내게 왔다고 생각했다.
전라북도 익산 왕궁면,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다. 집안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는 친척의 보증을 잘못 섰다가 집안의 모든 재산을 압류당했다.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는 월급이 들어오면, 90%는 빚쟁이들에게 뺏겼다.
가난은 냄새가 났다.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개인 화장실이 아닌 공용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살다 보니,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매번 같은 옷을 입었고, 발 크기에 비해 작은 신발을 신고 다니다 보니 발가락도 모두 휘었다.
“가난이라는 존재가 인생을 가로막는 느낌이었어요. 신발도 어렸을 때 신발만 계속 신었거든요. 제 키가 188cm인데, 260mm 신발만 계속 신었어요. 결국 발가락이 지금 다 휘어 있죠. 키가 크면 뭐하나요. 가난하니까, 저는 그저 주변에서 XX의 아들일 뿐이었어요.”
가난·바람·사기…“세상 모든 불행이 내게 오는 것 같았다”
불행은 끝이 아니었다. 13살 때 어머니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목격했다. 초등학교 옆 교회였다. 교회에서 나온 어머니가 다정하게 다른 남자와 걸어갔다. 부모님의 이혼을 직감했지만,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고 일어나니, 어머니는 사라졌다. 가출이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입을 맞춘 듯 어머니와 관련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가정에서 사라졌다.
“그때부터 꿈을 꿨어요. 어쩌면 복수심이 시작이었는지도 몰라요. 유명해지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배우가 될 순 없고, 한글을 쓸 수 있으니 소설가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어머니 없이도 잘 사는 모습을 꼭 나중에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다.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오래 일을 했다. 그때 했던 경험은 소설 ‘터널’의 기반이 됐다.
그렇게 건설 현장에서 번 돈은 300만원이었다. 마침 세이클럽 온라인 채팅에서 자칭 ‘소설가’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 그 사람은 자기가 서울에서 소설가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의심스러웠지만, 그 사람과의 채팅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 중 하나였다. 신뢰도 쌓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에 와서 본인 밑에서 소설가가 돼보라고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채팅을 통해 알게됐던 ‘소설가’에게 모았던 전 재산을 송금했다. 소년은 처음으로 꿈에 부풀었다. ‘이제 소설가가 될 수 있고, 유명해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서울에 상경했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복수심에 시작된 소설가의 꿈…노숙 생활하며 마주한 작은 호의
밤이 될 때까지는 괜찮았다. 라면을 하나 먹으면서 버텼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동이 트면서 좌절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그는 “인력시장이 어딘가요” 주변 사람들한테 계속해서 물었다. 가진 것은 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2002년, 2003년쯤이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 처음 와서 거기가 무슨 역인지도 기억이 안 나요. 사기당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음이 급해졌어요. 일용직 시장은 새벽에 문을 닫거든요.”
달리 갈 곳도 없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점을 발견했다. 소설가를 꿈꾸는 그에게 유일한 여가 장소이기도 했지만, 더 좋았던 것은 추운 겨울 몸을 녹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돌아갈 곳도 잘 곳도 없는 그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 서점이었다.
그렇게 서점을 집처럼 사용하던 때, 벼르고 있던 한 직원이 ‘냄새난다. 며칠째 항의가 들어왔다. 나가시라’고 했다. 황급히 서점을 빠져나오던 때 당시 다른 한 20대 여성 직원이 서점을 나오던 그를 불렀다. 그 직원은 “이 책만 읽으시더라. 다 못 읽은 것 같은데 제가 선물로 드리겠다”라며 책을 건넸다.
그때 직원이 건넨 책이 소록도를 배경으로 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이었다. 서점에서 사흘 내내 이 책만 읽었던 그는 작가로 데뷔한 후 이 책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라는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용직 생활과 노숙인 생활을 계속했다. 그럼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의지로 PC방을 전전하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소설 ‘터널’을 집필했다. 하지만 소설가의 문턱은 높았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몸과 터널 초판본뿐이었어요. 그렇게 터널을 집필했는데, 그걸 다 복사해서 들고 다녔거든요. 그런데 정말 어떤 출판사도 받아주질 않더라고요. 거의 200군데 넘게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돈이 없었는데 복사를 조금이라도 더 해보겠다고 돈을 다 썼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래서 실제로 시도 하기도 했어요. 근데 이렇게 죽기는 또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다짐했어요, 10년만 더 죽어라 살아보고 결정하자고요.”
우연히 만나게 된 호스트바 사람들…‘나는 텐프로였다’로 스타 작가 반열
노숙 생활을 경험하며 정말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호스트바 사람들이었다. 그냥 역에 있는 젊은 남자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는 걸 자주 보고, 일하고 싶다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호스트바 얘기를 소설로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기지였다. 그렇게 무작정 호스트바 생활을 이어갔고, 그때 경험을 살려 영화 비스티보이즈의 원작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를 완성했다.
가난의 상징이었던 그는 그렇게 자신의 경험을 살린 소설로 일약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다. 유명해지자 가족을 떠난 어머니와도 연락이 닿았다.
“어머니를 찾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들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그 과정에서도 정말 증오만 가득했는데, 막상 찾고 나니 눈물이 터져 나오고 보고 싶었단 얘기만 나오더라고요. 인생의 절반에 어머니가 없었는데, 그게 화났던 것 같아요.”
화려할 줄만 알았던 그의 작가 데뷔 이후 생활에도 굴곡은 있었다. 현재는 사회비판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로 알려졌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호스트바 이야기로 성공을 거둔 이후, 비슷한 작품인 ‘밤의 대한민국’을 썼지만 실패를 경험했다. 절필을 생각하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노숙생활 기억…“서점 직원 분 꼭 만나고 싶다”
그때 다시 책을 선물해 준 서점 직원이 떠올랐다. 그 때 ‘냄새 난다’ 타박 받던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그 서점 직원이 떠올랐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제가 쓴 작품을 직접 선물로 드리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아마 그 직원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살면서 제대로 받았던 첫 번째 친절이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여자 직원분의 작은 행동 하나가 제게는 작품세계의 반전이자 완성이 됐어요. 그때 떠오른 것이 ‘소원’이라는 작품이었어요. 지금도 떠올라요. 그때 거지꼴이던 저는 ‘고맙다’가 아니라 ‘작가 지망생입니다, 나중에 책 한 권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하고 나왔어요. 그분을 어서 만나서 변명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여전히 흔들리거나 힘겨움이 찾아오면 그때를 떠올린다. 그러곤 항상 그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품을 집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직원을 찾지 못했다. 이 직원을 찾기 위해 방송에서도 자주 언급했다. 역 근처 오래된 서점들을 다 뒤지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족들의 목소리를 담은 소설 ‘균’, 위안부 할머니와 한센병 환자의 이야기를 담은 ‘그날’ 등을 집필했다. 지난해에는 ‘벼랑 끝이지만 아직 떨어지진 않았어’라는 에세이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묻혀버릴 수 있는 약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시절을 겪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활발하게 작가 지망생과 청년들을 만나고 다닌다. 본인이 겪지 못했던 제대로 된 어른의 모습을 청년에게 전하겠다는 일념에서다.
“인간의 상처를 대변할 직업은 없고, 상처를 입으면서 이룩할 꿈의 가치는 없어요. 아픔이 있다면 그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저같은 청년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