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잘 읽지않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들어봄직한 이름이다. 하루키(69)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1Q84‘, ‘기사단장 죽이기’ 등 출간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인기작가다.
그런 그가 37년만에 기자들 앞에 섰다. 40여년간 글을 쓰면서 모은 자필 원고, 편지, 장서, 그리고 음악 마니아로서 소장한 레코드 2만여장까지 모교인 와세다대에 기증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결정에 대해 하루키는 “나에게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없어지면 그 다음에 자료들이 흩어질지 몰라서”라며 “제 작품을 연구하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창작 과정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지만 연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고도 했다.
와세다대는 ‘무라카미 라이브러리(가칭)’를 만들어 하루키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마음껏 자료를 활용해 연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하루키는 세계적인 작가이기에 그가 가진 자료들은 상당한 가치가 있다. 막대한 부를 얻을 수도 있는 아이템인 셈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이 정보를 독점하기보다 세상 모든 사람과 ‘공유’하기로 결정했다. ‘물려줄 아이가 없어서’라는 개인적인 이유를 내세웠지만 결국 하루키는 공유경제를 앞장서 실천한 또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앞서 지난 2014년 테슬라 창업자인 ‘엘론 머스크’는 전기차 사업 발전을 위해 테슬라가 보유한 수백개의 특허를 공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신이 가진 정보나 특허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범인의 눈에는 이들의 모습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일 수도 있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건 이런 하루키의 결단을 우리 제약업계가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국내 제약업계는 과거부터 폐쇄적인 면이 있었다. 내가 가진 의약품 개발 기술이 유출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꽁꽁 싸매기 바빴다. 내가 가진 정보는 ‘나만의 정보’였고 이를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은 ‘큰일날 일’이었다. 제약사가 어렵게 개발한 의약품으로 시장을 독점하려는 시도는 누구나 추구하는 선망의 대상이지 질타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의약품 개발 기술 역시 대물림의 대상이 돼 왔던 게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제약업계가 최근 몇년새 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제약업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 대표적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주로 신약개발 분야에 적용되고 있지만 벤처에 대한 투자와 외부의 새로운 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혁신적인 의약품을 만들자는 취지다. 외부와의 소통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신약개발을 위한 최선의 지름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고 있다. 최근 유한양행은 글로벌 제약사 얀센에 ‘레이저티닙’이라는 폐암치료 신약 후보물질을 기술수출하는데 성공했다. 계약 규모가 1조4000억원으로, 지금까지 국내 제약사가 기술 수출한 것 중 단일 항암제 기준으로 최대 규모다. 이런 성공적인 기술수출의 배경에는 유한양행이 추구한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이 작용했다. 유한양행은 지난 2015년 오스코텍의 미국 자회사 제노스코로부터 레이저티닙을 10억원에 사들였다. 레이저티닙의 ‘떡잎’ 가능성을 알아본 것이다.
만약 유한양행이 이런 전략을 택하지 않고 과거처럼 외부 품목(글로벌 제약사의 오리지널 의약품)을 도입해 대신 팔거나 오리지널 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면 복제약을 만들어 출시하는 옛 방법만을 고수했다면 이번과 같은 ‘잭팟’은 없었을 것이다.
유한양행 만이 아니다. GC녹십자, 한미약품 등 많은 제약사가 이같은 오픈된 마인드로 외부와 공유의 협업을 시도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자기 것만 알고 그걸 지키기만 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외부(대학, 벤처)에서 어떤 연구를 하고 있고 최신 개발 트렌드는 무엇인지 공부하는 제약사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글로벌 환경으로 볼때 늦은 감이 없는 건 아니다. 글로벌 제약사들은 일찍부터 바이오벤처나 연구자들을 찾아 다니며 떡잎 키우기에 나서왔다. 그리고 가능성이 보이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현재 개발된 많은 의약품이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하루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언젠가 전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누군가의 ‘잭팟’ 밑거름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루키의 기증 작업이 시작되면 와세다대는 ‘하루키의 성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국내 제약업계가 ‘혁신신약의 성지’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하루키의 교훈을 작 녹이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