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근 토이저러스 MD…태권V 사전예약 2000개 완판 -롯데마트, 대형 유통업체론 피규어 시장서 이례적 성공 -“10~50대 골고루 만족시키는 다양한 피규어 기획할 것”

[헤럴드경제=박로명 기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12시 정각에 토이저러스몰에서 ‘로보트 태권V’ 피규어 온라인 예약 판매를 오픈했어요. 사실 별 생각이 없었죠. 그 다음날 오전 8시 회사에 출근해 습관처럼 실시간 매출 조회 시스템을 켰는데 500개가 팔렸다고 뜨는 거예요. 믿을 수 없어서 페이지를 계속 ‘새로고침’해도 판매량이 쭉쭉 올라갔죠.”

불과 7개월 전. 김경근 롯데마트 토이저러스 상품기획자(MD)는 짜릿했던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지난해 7월 24일은 1976년생 로보트 태권V가 탄생한 지 꼭 4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롯데마트는 태권V의 생일에 맞춰 40㎝ 크기의 ‘로보트 태권V 피겨 메탈릭 버전’ 피규어 2000개 한정 사전 예약판매를 진행했다. 오픈 첫날 600개가 소진되고 15일만에 2000개가 완판됐다. 제도권 유통업체로서는 유례없는 대박이자 이례적인 실험이었다.

그는 “국내 피규어 시장은 극소수 마니아층 위주로 형성돼 있어 피규어 주문ㆍ제작ㆍ판매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알음알음으로 이뤄진다”며 “피규어 원형사가 네이버 카페에 샘플을 올리면 구매하고 싶은 사람들이 판매자의 계좌번호로 돈을 입금하고, 실제 피규어가 제작되기까지 최소 석달에서 최대 1년까지 기다리는 방식”이라고 했다. 일종의 ‘피규어 공동구매’인 셈이다.

김 MD는 “소규모 공방을 통해 소량 제작되는 국내 피규어는 대량생산이 어렵다는 점에 착안해 로보트 태권브이 예약판매를 기획하게 됐다”며 “물론 구상 단계에 머물던 피규어를 실제 기획ㆍ제작하기까지 백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고 했다.

김 MD는 지난해 초 토이저러스 MD로 발령받을 때만해도 ‘피규어 문외한’이었다. 4년 동안 롯데마트 부지개발팀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뚝 떨어졌다. 국내 대형 유통업체가 키덜트 시장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보니 거의 모든 것이 ‘맨땅에 헤딩’이었다.

그는 우선 ‘오즈의 초합금 창고’, ‘키덜트 드림 놀이터’ 등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피규어 계의 ‘네임드(온라인 유명인사)’ 유저들에게 다짜고짜 쪽지를 보냈다. “한 수 가르쳐 달라”며 끈질기게 구애를 하자 10명 중 1명꼴로 답장이 왔다. 그렇게 몇개월 간 피규어 마니아들과 친분을 쌓자 자연스레 피규어 시장에 대한 눈이 트였다.

그는 롯데마트가 기획하는 상품에도 ‘피규어 장인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철칙을 세웠다. 피규어 마니아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피규어의 재질, 색깔, 디테일 등 모든 것이 완벽해야 했다. 그는 재야의 고수들을 모아 피규어계의 ‘어벤저스’를 꾸렸다.

디자인 총괄은 ‘대인전기 무혼’으로 국내 피규어계를 놀라게 한 홍성혁 작가, 원형 제작은 국내 로보트 태권브이 피규어 제작 일인자인 김경인 작가, 컬러 버전 감수는 ‘태권브이의 아버지’인 김청기 감독이 맡았다. 이들을 태운 흥행의 양탄자는 높이 날았다.

김 MD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멋쩍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피규어를 기획하는 족족 흥행 반열에 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작년 10월 전문가용으로 500개 한정 예약판매를 진행한 61㎝ ‘THE 태권브이’는 이틀만에 완판됐다. 올해 1월 200대 한정 사전 예약 판매를 진행한 ‘토이저러스 합금 아스트로 강가’도 금세 품절됐다.

그는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10대~30대를 위한 대중적인 게임 피규어도 기획했다. 롯데마트가 지난해 11월 29일 내놓은 게임 피규어 블레이드앤소울은 출시 한달 만에 3만개가 판매되며 1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10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좀비고등학교 피규어도 지난달 26일 출시 이후 일주일만에 2만개가 팔렸다.

김 MD는 “소수의 마니아층과 다수의 대중을 모두 만족 시킬 수 있는 다양한 피규어를 기획하고 싶다”며 “예술가가 음악의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고민하듯, 그 미묘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언젠가는 만원짜리든 40만원짜리든, 토이저러스 기획 피규어가 모든 가정에 최소 한개씩은 채워지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