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강권에 폭언·성희롱 여전 직장인들 “괴롭지만 참는다” 위계질서 탓 침묵하기 일쑤

# 2년차 직장인 A(29ㆍ여) 씨는 작년 말 입사한 첫날 회사 선배들과 가진 술자리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소맥’을 수 차례 마신 한 여자 선배가 대뜸 A 씨를 가리키더니 “얜 나중에 선배들 뺨도 때리고 쌍욕도 할 수 있게 생겼네”라며 막말을 한 것. A 씨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튿날 A 씨는 회사에서 그 선배와 다시 마주쳤지만 그 선배는 아무 기억이 없는 듯 사과하지도 않았다. A 씨는 조용히 지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A 씨는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첫 인상만 보고 그렇게 얘기하는 걸 보고 상처 받았다”며 “술에 취한 상태면 그런 막말을 해도 되는거냐”며 울분을 토했다.

연말을 맞아 술자리가 잦아지고 있지만 여전한 술자리 비매너에 많은 직장인들이 괴로움을 겪고 있다. 폭행, 성추행 등 명백한 범죄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인신공격성 폭언이나 술 강권 문화도 만연하다.

특히 술 강권문화의 경우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됐지만 반강제적인 음주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1년차 직장인 B(32) 씨는 알코올을 조금만 섭취해도 온몸이 떨리고 심장이 크게 뛰지만 회식자리에서만큼은 술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술 강권 문화가 사라졌다며 걱정말라던 부장도 정작 술자리에선 “사내가 왜 이렇게 술을 빼냐”, “왜 이렇게 꺾어마시냐”며 압박이 심하다.

B 씨는 “회식자리라는 것이 결국 함께 친목을 도모하고 즐겁자는 건데 단 한번도 회식이 즐거웠던 적이 없다”며 “술자리는 늘 부장을 만족시키기 위한 자리일 뿐, 모두가 술자리의 진정한 의미를 모두 잊은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여성 직장인들은 비교적 술 강권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술자리 성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명백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불합리한 행동에 반기를 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4년차 직장인 C(32ㆍ여) 씨는 “부장이 술만 마시면 자꾸 여직원들한테 ‘예쁘다’며 외모 칭찬을 하면서 빤히 쳐다보거나 어깨에 손을 얹을 때가 있다. 가끔씩 ‘바나나’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성적인 농담도 서슴지 않는다”며 “대부분 ‘술을 마셨으니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여서 불편한 기색도 드러낼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여성가족부의 ‘2015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는 남녀 직장인 500명 가운데 39.8%가 상급자로부터 성희롱을 당했고, 여성 직장인(440명)의 46.7%는 회식 자리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술자리가 모든 구성원간의 친목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 만큼 모두를 존중하는 문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단순히 ‘술 마셔서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일 수 있다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하다”며 “위계질서가 있는 곳에서라도 본인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화도 정착돼야 고질적인 음주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