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8일 2026 서울국제음악제 개막
카르워비치 초연·노라스-김규연 50년
초연부터 23인 실내악…4가지 승부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단 14편의 작품을 남긴 서른둘의 작곡가. 그는 어느 날 타트라산맥의 설원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후기 낭만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인간 내면의 음침한 심연과 금기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던 폴란드 작곡가 미에치스와프 카르워비치(Mieczysław Karłowicz, 1876~1909)의 이야기다. 그가 탄생 150주년을 맞아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는다.
“연주를 들어보면 정말 깜짝 놀라실 거예요. 너무나 로맨틱하고 훌륭한 곡들인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어요. 한 곡 한 곡이 걸작이에요.”
올해로 열여덟 번째 축제를 맞은 서울국제음악제(10월 8~16일까지, 예술의전당 롯데콘서트홀)의 시선은 ‘비운의 천재’에게로 향했다. 류재준 서울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은 “몇 년만 더 살았어도 쇼팽 이후 폴란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거장이 됐을 것”이라며 카르워비치를 소개했다.
지난 150년간 그는 잊혀진 작곡가였다. 카르워비치의 음악은 당대가 품어내기 어려운 금기로 가득했기 때문이리라. 류재준 감독은 “근친상간처럼 관객들이 꺼리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주제를 다뤘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여겨질 만큼 음침했다”며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지지한 반면 브람스에 대해선 대놓고 악평을 쏟아낼 정도로 극단적인 면모가 있었다”고 짚었다.
시대가 변하니 그의 극단성은 ‘전위 예술’이라는 가치를 입게 됐다. 류 감독은 “과거에는 A, B 다음에 C가 나오는 게 당연했지만 카르워비치는 A, B 다음에 느닷없이 ‘ㄱ’이 튀어나온다”며 “당대엔 이상하게 여겨졌던 그 파격이 오늘날엔 눈부신 다채로움으로 다가온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예술을 겪으며 성숙해진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의 독창적인 선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됐다”고 덧붙였다.
올해 음악제의 주제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다. 전쟁과 감염병, 사회적 혼란 속에서 각자의 일상을 버텨내는 대중에게 삶을 향한 위로와 축복을 건넨다는 취지다.
류 감독은 “심각한 주제를 던지기보다 듣고 희망을 얻어 생업에 힘이 될 수 있는 축제를 만들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축제는 따스한 기치 아래 상업주의에 가려진 ‘클래식 음악의 본질’을 복원하는 데 승부수를 던진다. 9일간 이어지는 타협없는 음악적 승부수다 .
첫 승부수는 인물이다. 카르워비치의 음악사적 복원과 예술의 연대다. 내달 16일 폐막 공연에서 그의 대표 교향시 ‘스타니스와프와 안나 오시비엥침(Stanisław i Anna Oświęcimowie)’이 국내 초연된다.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인 크시슈토프 우르바인스키가 처음으로 내한해 SIMF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뿐만 아니라 주한 폴란드 대사관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 국내 대학 학술 강연도 병행한다.
사람과 사람, 연주자와 연주자 사이의 인연이 확장되는 무대도 있다. 류 감독이 이번 축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는 무대로 꼽은, 아르토 노라스와 김규연의 듀오 리사이틀(10월 14일)이다. 여든넷의 핀란드 첼로 거장 아르토 노라스는 반세기 전 한국인 피아니스트 1세대인 이경숙과 호흡을 맞췄다. 세월이 흘러 그는 이경숙의 딸인 피아니스트 김규연과 2대에 걸친 앙상블을 완성한다. 류 감독은 “음악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며, 의도치 않더라도 아름다운 추억과 스토리가 겹겹이 쌓여가는 것”이라며 “연세를 고려할 때 한국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고 소회를 들려줬다.
두 번째 승부수는 ‘공공 축제의 사명감’이다. ‘세레나데(10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엔 무려 23명의 연주자가 단일 실내악 편성에 함께한다. 모차르트의 ‘그랑 파르티타’와 브람스의 ‘세레나데 1번’을 소형 오케스트라 규모로 선보인다. 류 감독은 “서울국제음악제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한 기획”이라며 “티켓 판매 손익만 따져선 결코 올릴 수 없는 무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시 세금을 지원받는 축제로서, 이런 위대한 음악을 시민들이 평생 한 번은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밀어붙였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승부수는 건반과 현악 위주의 지형도를 뒤흔들 관악(금관·목관) 저변 확대와 정상급 솔리스트들의 향연이다. 개막 공연 ‘숨, 그리고 삶’(10월 8일)부터 전 곡에 관악기를 배치했으며, ‘호른의 제왕’ 라도반 블라트코비치와 ‘트럼의 전설’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 등 세계 최정상 거장들을 4일 내내 무대에 세운다.
류 감독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편중된 국내 음악계에서 오케스트라의 뼈대인 금관과 목관이 더욱 대중화돼야 한다”며 “세계적 대가들의 탁월한 명인기를 통해 관악 연주자들의 저변이 한층 넓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비르투오소들의 밤’(10월 11일) 역시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연주 도중 지휘자의 손에 맞아 100억 원대 과르네리 바이올린이 공중으로 날아가 박살 나는 아찔한 사고로 전 세계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핀란드의 간판 바이올리니스트 엘리나 베헬레가 비올리스트 이한나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마지막 승부수는 솔리스트 경쟁에 갇힌 유망주들을 향한 ‘교육과 연대의 플랫폼’이다. 지난해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에 이어 올해는 첼리스트 이재리, 바이올리니스트 이현정 등 음악 영재들이 거장들이 포진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나란히 자리한다.
류 감독은 유망주들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을 솔직히 드러냈다. 그는 “어린 친구들을 볼 때마다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앞으로 커가면서 겪어야 할 질시, 그 과정에서 수없이 구겨져야 할 자존심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가 이 자리에 음악 영재들을 세우는 것은 보다 확장된 세계에서의 음악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류 감독은 “대부분의 어린 연주자들이 솔리스트로만 교육받아 평생 오케스트라가 돌아가는 원리를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단순한 배움을 넘어 한 공간에서 함께 음악을 빚어내는 과정”이라며 “기반이 미약한 어린 연주자들에게 든든한 배경과 협동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국제음악제가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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