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8월 시작한 ‘홍길용의 화식열전’이 900회를 맞았습니다. 마침 오늘 코스피도 9000선에 올랐네요. ‘홍길용의 머니스토리’로 시작해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기까지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 덕분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많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 칼럼에서 보기 드문 1000회까지 과연 갈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재명 대통령님께.
2008년부터 ‘홍길용의 화식열전’을 연재해 이번 글로 18년 만에 900회를 맞게 됐습니다. 나름 900회 글을 고민했습니다. 마침 한국 증시의 MSCI 선진지수 편입 이슈가 중요해졌습니다. 올해 당장 쉽지는 않겠지만, 대통령님 임기 중 반드시 이뤄야 할 과업이라고 생각해 이번 글을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로 씁니다.
이번 달이 분수령입니다. 오는 24일 MSCI 연례 시장 분류 리뷰에서 한국의 선진국 관찰대상국(watch list) 등재 여부가 가려집니다. 올해 등재되더라도 길은 단계적입니다. 올해 되지 못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일정은 대통령님 임기 안에 놓여 있습니다. 충분히 임기 내에 완성할 수 있는 과업입니다.
G7 회의장을 다녀오신 직후입니다. 한국은 정식 멤버는 아니지만 최근 G7 회의장에 반복적으로 초청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한국을 선진국의 핵심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반도체, 방산, 조선, 배터리, 자동차, K-팝과 드라마를 빼고 이제 세계 경제와 문화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나라는 선진국인데, 글로벌 증시 지도에서는 아직 신흥국입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완성되는 마지막 숙제는 자본시장입니다. 한국 증시의 선진지수 편입은 단순한 증시 호재가 아닙니다. 글로벌 자금의 엄청나게 큰 흐름을 바꾸는, 경제사에서 보기 드문 초대형 시장 재분류 사건입니다. 동시에 우리 경제의 체질과 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대도약의 필요조건입니다.
코스피 2만 시대로 가는 첩경입니다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최근 글로벌 6위권까지 올라섰습니다. MSCI 신흥국 지수에서 한국 비중은 5월말 23%이지만, 최근 증시 급등을 반영한 증권가 추정으로는 26%까지 높아집니다. 한국의 선진시장 편입은 과거 그리스나 이스라엘 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한국 정도되는 시장이 움직이면 글로벌 전체로 선진시장과 신흥시장의 비중에도 영향을 미칠 듯 합니다. 한국이 선진국 지수에 들어가면 선진국 지수 구성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특히 선진지수 편입은 한국 기업의 밸류에이션을 바꾸는 일입니다. 한국 증시의 선행 자기자본이익률(ROE)은 28.9%로 신흥국(18.3%)과 선진국(18.9%)을 50% 넘게 웃돕니다. 그런데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8배 안팎으로, 신흥국 대비 31%, 선진국 대비 57% 낮습니다. 한국은 자산이 부실해 싸게 거래되는 시장이 아닙니다. 높은 이익을 내고도 낮은 값에 거래되는 시장입니다.
선진시장으로 재분류되면 비정상적인 할인율이 정상화될 수 있습니다. 기업 이익 성장까지 이어진다면, 코스피 1만5000이나 2만도 단순한 구호가 아닌 산술적으로 충분히 검토 가능한 영역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지수 목표가 아닙니다. 한국 기업이 제값을 받는 시장의 상징입니다.
신한투자증권 추정(노동길 전략가, 6월 16일)에 따르면 한국이 MSCI 선진지수(MSCI World)에 편입되면 약 3.8%를 차지해 미국, 일본에 이은 세 번째 구성국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 지수인 EAFE에서는 14%까지 거론됩니다. 현재 추정치는 지금 가격으로 계산한 값입니다. 지금 한국 증시의 가격에는 아직 신흥국 할인과 외환시장 제약이 반영돼 있습니다. 선진시장으로 재분류되는 순간 가격 자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경제 체력에 K-컬쳐까지, 자격은 충분합니다
펀더멘털은 충분합니다. 미국은 소프트웨어와 원천기술, 플랫폼에서 압도적 우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은 코드와 특허만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것을 반도체로 만들고, 전력망으로 연결하고, 함정과 위성, 배터리와 자동차, 공장과 데이터센터로 구현해야 합니다. 그 물리적 구현과 양산 능력에서 한국 기업은 세계 최상위권입니다. 한국 증시는 그 구현 능력을 담은 시장입니다.
AI에는 HBM과 메모리, 전력기기와 냉각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우주에는 정밀 제조와 소재, 위성과 방산 기술이 필요합니다. 방산에는 양산과 납기, 탄약과 지상무기, 함정과 전자장비가 필요합니다. 에너지 전환에는 원전, 전력망, 배터리, 전기저장장치(ESS)가 필수적입니다. 한국 기업은 이 전선 곳곳에 서 있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습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한 역사도 없습니다. K-팝과 드라마, 영화와 음식, 뷰티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를 모두 가진 나라는 역사에서 많지 않습니다. 한국은 세계가 두려워하는 강국이 아니라, 세계가 좋아하고 믿는 강국입니다.
선진지수 편입은 글로벌 K-투자 열풍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K-컬처가 세계인의 마음을 열었다면, K-투자는 세계인의 포트폴리오를 여는 일입니다.
부동산·청년·고령화 문제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이 변화는 국민의 삶과도 연결됩니다.
부동산 쏠림은 탐욕이 아니라 성공의 기억입니다. 과거 세대는 집을 통해 중산층이 됐습니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집값이 오르며 자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청년에게 부동산은 사다리보다 벽에 가깝습니다. 청년에게 다시 사다리가 필요합니다. 그 사다리는 기업의 성장이어야 합니다. 월급의 일부를 좋은 기업과 지수에 투자하고, 배당과 자사주 소각과 기업가치 상승을 함께 누리는 길이어야 합니다. 부동산 쏠림은 부동산보다 더 나은 투자처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완화될 수 있습니다.
집이 없는 청년도, 월급을 모아 연금에 넣는 직장인도 한국 기업의 성장에 함께 올라탈 수 있어야 합니다.
증시가 커지면 각종 연금 수익률도 높아집니다.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의 지속가능성도 개선될 수 있습니다. 국민의 노후가 튼튼해지면 정부의 장래 재정부담도 낮아집니다. 고령화에 따른 소비 둔화 걱정도 줄일 수 있습니다. 견조한 경기와 탄탄한 재정은 정부가 미래지향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선진지수 가는 길의 가장 큰 걸림돌 외환시스템
선진지수 편입은 외국인 투자자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국민자산 프로젝트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증시는 왜 아직 선진지수에 편입되지 못했을까요?
기업의 경쟁력과 시장의 크기는 이미 충분합니다. 대통령님께서 추진한 상법 개정 등의 작업 덕분에 주주 중심 경영도 진전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코스피는 전세계 주요 지수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 중입니다. 영문 공시와 글로벌 투자설명회(IR) 같은 조건은 의지만 있다면 빠르게 실행할 수 있습니다.
남은 가장 큰 병목은 외환입니다. 외환위기의 기억은 경제관료들과 경영자들에게 깊은 경계심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경계심이 한국 자본시장의 할인율이 되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지난 30년간 관료사회를 지배한 외환에 대한 논리는 이렇습니다.
“소규모 개방경제이고, 수출입 비중이 높아, 역외 원화거래를 허용하면 외환시장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
한국 경제의 현실이 바뀌었습니다. AI 혁명과 관련된 한국 기업들의 매출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무역 규모도 커졌고, 증시가 급등하면서 자본시장 크기도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과거의 자기인식만으로 수출입대금과 은행 중심 거래에 의존하던 시스템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글로벌 자금이 원화를 바꾸고, 주식을 사고팔고, 결제하고, 헤지하고, 다시 빠져나가는 과정이 선진국처럼 편해야 합니다. 외국 기업이나 투자자들이 원화나 원화자산을 보유해도 높은 환율 변동성 때문에 걱정할 일은 적어야 합니다.
경제 규모 걸맞는 외환시스템은 선택 아닌 필수
외환시장을 선진화하면 변동성이 커지고 달러 유동성 경색이 초래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편한 외환시장은 이미 비용을 만들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등 우회 시장을 활용하고, 그 불편의 대가는 한국 자산의 할인(discount)으로 나타납니다. 한국 기업의 덩치는 선진국인데 외환 인프라가 신흥국 문법에 머물러 있으면 할인은 계속됩니다. 원화의 주체성이 약하니 위안화나 엔화 움직임에도 쉽게 끌려갑니다. 코리아디스카운트는 아직도 존재합니다.
외환위기는 외환시장을 열었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정부가 훨씬 더 강력하게 환율을 통제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화 유동성 관리 능력과 금융시스템의 신뢰입니다.
최근 자본시장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외환거래 시간을 새벽까지 연장한 뒤 환 변동성이 오히려 안정되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7월 6일부터 24시간 거래 체제가 안착하면 변동성이 더 낮아질 여지도 있습니다. 변동성 축소는 수출 기업과 외국인 투자자의 환전 위험을 낮추고, 이는 다시 원화 가치를 안정시키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외환시장 개혁으로 선진지수 편입이 이뤄지고 글로벌 자금의 한국 증시 투자 규모가 커지면 미국이나 유럽 등 기축통화국이 한국과 상설 통화스와프(swap)를 체결할 필요도 커집니다. 통화스와프는 이들이 한국을 도와주는 선심이 아니라, 한국시장에 투자한 이들 국가 자금의 입출금 안전판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거래소서 코스닥 분리해 이전 상장 막아야
선진지수 편입의 첫 물결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초대형주에 쏠릴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한 나라 자본시장의 미래는 이미 큰 기업이 아니라, 앞으로 큰 기업이 될 곳에서 자랍니다. 그 요람이 코스닥입니다. 지금의 코스닥은 지배구조부터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코스닥에서 데뷔해 몸집을 키운 뒤 거래소로 옮기는 건 이제 공식이 됐습니다. 성장기업의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인 구조로는 선진 기술주시장이 되기 어렵습니다. 나스닥이 뉴욕증권거래소의 2부 시장이 아니듯, 코스닥도 코스피의 2부 시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 가면 수도권 집중과 같은 현상이 자본 시장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한국거래소에서 코스닥을 분리・독립시켜야 합니다.
글로벌 K-투자의 열풍,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K-투자는 구호가 아닙니다. 세계 투자자가 한국 기업을 이해하고, 믿고, 오래 보유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와 문화입니다. 외환시장 접근성, 영문공시, 글로벌 IR, 주주환원, 일반주주 권리, 코스닥 독립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세계가 한국을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한국 국민이 그 성장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은 이미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산업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가 좋아하는 문화도 갖고 있습니다.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동맹의 기반도 갖고 있습니다. 산업도, 문화도, 동맹도 이미 선진국입니다. 마지막 한 칸이 시장입니다. 그 칸을 채우는 순간, 한국은 비로소 완전한 선진국이 됩니다.
부동산이 사다리였던 시대는 저뭅니다. 저물어야 합니다. 다음 세대의 사다리는 한국 기업의 성장이어야 합니다. 집 없는 청년이 한국 기업의 주인이 되는 길, 그 문을 여는 열쇠를 대통령님이 쥐고 계십니다. 한국 증시의 선진지수 편입은 주가 이벤트가 아닙니다. 한국 경제의 신분 변경입니다.
18년 동안 저는 돈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적어 왔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돈은 믿을 수 있는 곳으로 모입니다. 세계는 이미 한국을 믿습니다. 남은 일은 그 믿음이 한국 시장으로 흘러들게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님 임기 안에, 그 마지막 문을 열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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