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EBS가 가는 방향은 지식 콘텐츠 허브를 만드는 것이다. EBS는 초·중·고교 교육학습채널로 머무르지 않고, 국민 전체의 보편적 지식채널로 가야한다. 이념적 편향성이 없는 지식, 가치가 있는 지식채널로 자리잡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지난 18일 경기 고양시에 있는 일산 EBS 사옥에서 만난 김유열(60) 사장은 불편부당한 가치채널로 가는 게 EBS의 가장 큰 차별화 전략이자 정체성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맥락에서 ‘다큐프라임’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지식채널e’ 등을 프라임 타임대에 배치해 시청자들로부터 오랜 기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꼭 만들어야 하는 콘텐츠인 세계 석학들의 강연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그 정점을 찍었다. 김 시장은 ‘위대한 수업’을 기획하고 제작비 마련을 위해 뛸 때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1천명이 있는 사이트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다큐프라임’처럼 시간이 지나도 효용가치가 있는 아카데믹한 다큐물을 제작했다. EBS는 제작비가 많은 회사가 아니다. 회당 제작비 1500만원 프로그램 세 개를 없애고 회당 5천만원 짜리 다큐 한 편을 만들어 세 번을 틀어주는 전략을 썼다. 김 사장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콘텐츠가 큰 힘을 발휘한다. 유튜브의 등장 이후 EBS 콘텐츠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고 전했다.
다큐프라임실제로 김사장이 PD 시절 제작한 ‘신들의 땅 앙코르’(2011년)와 ‘위대한 바빌론’(2013년) 등 2개의 다큐는 유튜브로 업로드되자 조회수가 300만을 넘기기도 했다. 10년 이상 된 콘텐츠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지식 콘텐츠의 포텐셜이 누적되면서 파워가 생겼다. 유튜브를 통해 EBS를 통해 다큐를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구독자가 480만명이다.”
그렇게 해서 EBS는 방송과 인터넷을 아우르는 미디어의 용광로로서, 교육, 지식 관련 데이터 저장소로서 국민들이 지식과 지혜, 통찰을 얻어갈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해나가고 있다.
김유열 EBS 사장은 콘텐츠를 연출한 다큐제작 PD이자 콘텐츠를 기획, 개발하는 편성기획통이며, 방송국 경영인이기도 하다. 콘텐츠의 거의 전 영역에 걸친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김 사장이 연출과 기획에 참가해 성공한 프로그램들은 수도권 시청률이 10%라는 초대박을 터뜨렸던 강의 프로그램 ‘도올 김용옥의 알기쉬운 동양고전-노자와 21세기’(1999년~2000년)와 ‘다큐프라임’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극한직업’ 등 실로 다양하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에 EBS에 입사해 편성기획부장, 뉴미디어부장, 지식정보부장, 정책기획부장, 학교교육본부장, 부사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쳐 2022년 3월부터 EBS 사장으로 3년을 근무했다. EBS 출신 첫 사장이기도 하다. 특히 프로그램 성격을 결정짓는 편성기획 부장 자리를 세 차례나 역임하며 콘텐츠 혁신을 주도했다.
김 사장은 EBS가 2022과 2023년에는 적자였지만 지난해 흑자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지르는 작업’인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조직내에서 혁신은 불편할 수 있지만 의지와 사명감으로 이뤄내야 한다고 했다.

-결국 혁신은 꿈을 기획하고 디테일로 승부를 본다는 이야기네요. 세 번째는 뭡니까?
▶세번째, 혁신하고자 하는 사람의 굳건한 의지와 끈기인 것 같습니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래된 꿈이었습니다. 1999년 11월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기획, 방송했는데 시쳇말로 정말 대박이 났습니다. 방송이 나간 다음 날부터 편성기획부 사무실의 전화 폭주로 오전 내내 불통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격려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가장 강렬한 피드백이 왔습니다. EBS가 직접 출판한 것은 아니지만 ‘노자와 21세기’ 책이 연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수십만권이 팔리고 당시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 판매했는데 판매 매출 사상 최고를 경신했죠. 당시 EBS가 모방송과 광고를 결합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결합판매를 하고 있죠. 다른 방송의 광고판매물량에 연동해서 EBS에 일정정도 강제로 광고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노자와 21세기’에 광고가 완전히 차서 ‘노자와 21세기’에 광고를 하기 위해선 다른 방송에 광고를 해야했습니다. 지금까지 공사화된 이후 딱 한번 있었던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도 놀랐습니다. 강의 프로그램 하나가 이렇게 파괴력이 크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죠.
너무 과격한 혁신을 한 탓인지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2002년 편성기획부장을 하차하고 제작에서 연출을 하다가 2005년 평생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뉴미디어 부장으로 인사가 났습니다. EBS 인터넷 사이트와 디지털 콘텐츠 판매를 하는 부서입니다. 이 때 ‘다큐 프라임’, ‘세계테마기행’, ‘위대한 수업’을 기획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현실화시킬 방안을 찾았습니다. 비록 방송 편성, 제작부서는 아닌 뉴미디어 부장이었지만 도올 선생의 ‘노자와 21세기’와 같은 폭발력이 강한 콘텐츠를 뉴미디어로 기획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도올 선생을 다시 초대, 인터넷 영어 교육 콘텐츠라는 명목으로 ‘요한복음 강해’를 VOD로 제작해 서비스를 했습니다. 방송도 아니고 관객도 없는 조그마한 뉴미디어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2대로 VOD를 제작했는데 동참해주셨습니다. VOD 매출도 급상승했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강의전문 OTT를 만들자고 꿈을 꾸었습니다. 국내외 최고 석학으로 이뤄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었죠. 섭외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2000년 편성기획부장일 때는 통제할 수 있는 제작 예산이 총 300억원이 넘었습니다. 뉴미디어 부장을 하니 제작 예산은 아예 없고 디지털 콘텐츠 제작으로 융통할 수 있는 총 예산이 3억도 채 안되었습니다. 이런 예산을 가지고 국내외 석학을 모신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도올 선생과의 ‘요한복음강해’도 도올 선생이 양해를 해줘서 거의 출연료를 드리지 못했죠.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고 수익이 나면 나중에 수익쉐어를 하는 방식으로 강의전문OTT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처럼 OTT 시대가 무르익었다면 아마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2007년 뉴미디어부장에서 편성기획부장으로 돌아와서 ‘세계테마기행’, ‘다큐 프라임’ ,‘한국기행’, ‘극한직업’ 등 다큐 중심의 편성 혁신을 하면서도 세계석학콘텐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죠. 역대 가장 적은 제작비 상황에서 세계석학시리즈까지 도모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서 사실상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의 뿌리가 그렇게 오래되었군요.
▶2005년부터 꿈꾸다 2022년에 실현되었으니 17년은 족히 걸린 것 같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언젠가는 꼭 실현시키고 싶었습니다. 2019년 12월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 유시춘 이사장과 김명중 전사장과 함께 추진했던 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혼자였다면 여전히 불가능했을 겁니다. 두 분외에도 여러 분들이 열정적으로 도와줬습니다. 2005년보다도 더 큰 비전을 가지고 ‘위대한 수업’를 기획했습니다. 세계최고 수준의 글로벌 석학 전문 OTT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체 예산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외부 예산을 유치하기 위해 저뿐만 아니라 이사장, 사장, 실무자 모두 열심히 팔방으로 뛰었죠. 예산 유치를 위해 논리적인 기획서도 준비했지만 실은 그 어느 때도 해보지 않은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편지 글로 호소하기로 했습니다. 직접 편지를 썼죠. 감성적인 접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편지 첫 문장을 “아인슈타인, 뉴튼, 갈릴레이, 데카르트, 칸트 등과 같은 지구 역사를 바꾼, 수 천명의 위대한 지성들의 동영상 강의를 누구나 볼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고 시작했습니다. 대개 목전에서 편지 글을 읽으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가능해요?” 하고 묻습니다. 가능한 이유를 조목조목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도 감성적으로 썼죠. 지식혁명이 일어나, 지식의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강조했습니다.
EBS가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미디어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한국 사회에 EBS가 존재하는 이유와 가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EBS가 수 백, 수천 개의 여느 미디어 중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죠. EBS가 한국사회의 의식과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입니다. 점점 막말사회, 반지성사회가 심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상과 계층과 사회의 양극화가 점점 극에 달하는 느낌입니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기획에 가장 영감을 준 사람이 있다면 일본의 개화기 사상가이며 교육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입니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탓에 젊었을 때부터 메이지 유신과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가 1860년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해 상술한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56년전 발행된 책입니다. 2,000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는 평을 듣던 당시 24만권이나 팔렸습니다.
후쿠자와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유려한 문어체가 아니라 쉬운 구어체로 책을 썼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국민들은 이미 1860년대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서양사정에 눈을 떴던 것입니다. 이래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뻔하다 불행하게도 실패하게 됩니다. 1881년 메이지 유신을 배우기 위해 파견되었던 조선의 ‘신사유람단’에 유길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 유길준은 남아서 ‘서양사정’을 쓴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일본과 서양사정을 알리는 ‘서유견문’을 썼습니다. 불행하게도 역모에 휘말려 ‘서유견문’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금서(禁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사유람단’의 공식 보고서도 순한문으로 쓰여진 채 왕실 서고에 비치되어 극소수의 사람만 보게 되었습니다. 서양에 관한 지식은 차단되고 고립되고 극소수 엘리트가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불행이 지식의 차단, 부재, 독점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도 고급 정보, 고급 지식은 독점되고 차단되어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정보가 지나칠 정도로 넘쳐나지만 대개 지엽말단적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대학은 폐쇄적입니다.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혁신과 창의의 정신이 필요한 시기에 와 있습니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이제 4년째 접어듭니다. 120명의 석학이 출연했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평가를 해주지만 당초 거대한 꿈에 비해 너무도 빈약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로 하나 건설하는 예산만 투자했었어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현대판 아인슈타인, 갈릴레이, 데카르트와 같은 세계 석학 수천명의 동영상을 서비스하는 플랫폼이 불가능한 걸까요? 한국사회의 펀드멘탈이 무너져 가고 있는데 우리는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예산도 올해 끊기었습니다.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EBS 예산만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플랫폼과 콘텐츠에 수천억원을 투자하면 전국민이 무상으로 전세계의 지혜와 지식을 향유할 수 있는데 소수만 누릴 수 있는 도로와 같은 인프라에는 과감히 투자를 합니다.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천박함이라고 생각합니다. AI 혁신이 GPU를 구비하고 데이터 센터나 짓는다고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AI 혁신을 주도한 인력이 부족한데 AI 교육은 등한시 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의식을 바꾸는 일은 모두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하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시대에 자동차의 존재를 바라보게 하는 것만으로 곧 자동차를 발명하게 됩니다. ‘서양사정’은 말 타는 수십만명의 독자들에게 증기기관차를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본질인 것입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결국 동양으로 향하는 희망봉을 개척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수천만명에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무상으로 ‘서양사정’과 ‘동방견문록’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고 싶어 탄생된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바라보는 위대한 시선을 제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뭔가 비장한 의지가 읽혀집니다.
▶혁신에 성공하기 위해선 굳건한 의지로 다져진 사명감 같은 게 필요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극소수 몇 명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일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뒤흔들 혁신에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개인의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이 역사적 사명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사람을 이기기란 어렵습니다.
저는 EBS의 일도 국가의 일처럼 역사적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견지하며 살아왔습니다. 혁신을 하다 보면 수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힙니다. 공영방송에서 혁신에 성공해도 금전적 보상이 이뤄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하며 후회할 때도 많습니다. 사실 혁신에는 인신공격성 비난도 이어집니다. 혁신의 과정 중에 무너지는 것은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사적 이익이나 개인적 영예만 쫓다 보면 혁신의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시험과 반대에 스스로를 내줍니다. 시험과 반대로 개인적으로 잃어야 할 이익이 더 많은 걸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렇게 무리한 혁신을 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래서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의지에는 욕 먹을 각오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욕 먹을 각오’라는 게 참 힘듭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도 아니고 수십년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 맥이 확 풀립니다.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정말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움만 받아온 건 아니지 않나요?
▶당연합니다. 계속 미움만, 욕만 먹고 살아왔다면 벌써 망했겠죠. 실은 저는 과분한 사랑을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게 EBS에서의 삶은 ‘영광’이었습니다. 수많은 동지와 동료들의 ‘지지’가 아니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EBS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wp@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