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수민 기자] #1월 9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유세장. 도널드 트럼프의 유세 도중 히잡을 쓴 한 여성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녀의 티셔츠에는 “살람,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Salam, I come in peace)”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유세장 화면에 이 여성의 모습이 잡히자, 청중들은 “트럼프” “트럼프”를 연호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경찰의 호위(?) 속에 유세장에서 쫓겨났다. 청중들 사이에선 “나가라” “당신은 폭탄을 갖고 있다”는 야유가 계속됐다.
#“트럼프가 무엇을 원하면 그는 반드시 그걸 쟁취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싸워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19세 타리오 밀스라는 한 여성이 전하는 말이다. 성소수자의 권리(LGBT)를 원한다는 그녀는 트럼프가 LGBT와 거리가 먼 후보라는 사실에도 아랑곳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트럼프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를 지지할 것이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트럼프 팬덤’이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 지지자들은 주변의 시선도, 사회의 우려스러운 목소리도 아랑곳 않는다. 오로지 트럼프 한 명만을 쳐다보고 그의 행동에 열광한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모든 믿는다. 열성 팬들에게 그 만큼 진실한 사람도 없다.
보통 미국인이라면 트럼프를 찍지 않을 것이라는 게 세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무참히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트럼프가 ”못 배운 백인 노동자”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는 세간의 분석도 보기 좋게 틀렸다. 트럼프를 변기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지만, 트럼프 바람은 계속되고 있다. “인종 차별주의자에 광대, 선동적 정치가인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트럼프는 대선 본선에 성큼 다가섰다. “키가 작든, 크든, 뚱둥하든 마른 사람이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열렬한 복음주의자건, 군인이건” 보통 미국인들은 오히려 트럼프에게 열광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이제는 단순히 웃어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블룸버그 통신이 지난해 말 가정한 ‘최악의 2016년’의 전제조건 중 하나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왜 미국인들은 세간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일까?
반(反) 트럼프 미국인들이, 그리고 보통 세계인들이 이해 못하는 ‘트럼프 팬덤’엔 자기몰두, 좌절, 그리고 무수히 절망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 본성이 현실 정치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에 대해 “트럼프 랠리는 팔팔 끓는 가마솥 처럼 인간의 가장 밑바닥 본성이 분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간 미국인의 환상에 덧칠돼 있던 ‘세계 경찰’ ‘아메리칸 드림’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세상을 구하는 영웅’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이 ‘트럼프 팬덤’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좌충우돌 트럼프를 통해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기존 정치인들과 달리 점잖을 빼지도 않았다. 게다가 트럼프는 그동안 백인 보통 미국 남성들이 말하고 싶었던 말들을 속 시원하게 대놓고 떠들었다. 멕시코 등 이민자들을 미국에서 내쫓아야 된다느니 같은 말들을 내뱉는 데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열성팬들에게 트럼프는 터프하면서도 가죽 벨트를 계속 담금질하는 그런 카리스마까지 가진 사람으로 인식됐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에게 세계의 경찰, 정의를 외칠 만한 여유는 없다. 우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원치 않은 판국에 세계의 경찰이나 정의니 하는 것은 가식이고 사치다. 굴지의 사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는 트럼프야말로 미국을 경영할 수 있다는, 그리고 자신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환상(?)이 ‘트럼프 팬덤’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내 일자리 지키기, 내 나라 살리기에도 바빠진 상황에서 이민자들을 포용하라니 미국인들은 한층 더 뿔이 났다. 최근 유럽으로 급격히 유입된 시리아 난민을 미국도 끌어 안았다. 국민의 뜻이 아닌 정치권의 뜻이었다. 일자리도 뺏기고, 세금 지출도 많아질 것이란 생각에 미국인들의 불만은 폭증했다. 지난해 말 퀴니피액 대학교가 전국 유권자 114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1%는 버락 오바마 정부의 난민 수용 계획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43%에 그쳤다.
그러나 그런 불만은 개인의 투덜거림으로 그쳐야 했다. 미국은 국제 사회의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과 현재까지 그렇게 해 온 관성 때문이었다. 책임과 절제가 정통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이었다. ‘싫다’고 막무가내로 외쳤다가는 군사력, 경제력 등 모든 것의 정점에 서서 이익만 취하고 의무는 저버린다는 비판이 날아올 터였다.
그런데 마음에 쌓인 그 말들을 대신 외쳐주는 이가 나타났다.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하게”를 외치는 트럼프였다. 남의 나라 신경 쓸 시간에 미국부터 돌아보자고 외친 트럼프였다.
우선 경제 문제를 꼬집었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의 방향이 옳지 못하다며 비판을 쏟아 부었다. 최근 CNBC와의 인터뷰에서는 미국 경제의 거품이 크다고 밝혔다. 또 낮은 실업률 또한 구직 포기자들을 포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구라고 밝혔다. 미국 경제를 수술해야 할 대상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자신이 해보이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자금도 스스로 충당하면 된다고 할 만큼 성공한 사업가의 말은 지지를 얻었다.
여기서 빈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이민자들이 미국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며 이민자 문제까지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트럼프가 멕시코인들에 대해 마약과 범죄를 들여오며, 성폭행범이라고 했던 발언은 잘 알려져 있다.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국경에 장벽을 설치할 것이며 그 비용을 멕시코로 하여금 부담하게 하겠다고 하는 등 나름의 구체적 방안(?)도 제시했다.
정치적 수사로 애매모호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세계의 지도자 역할에 충실했던 현재까지의 정치권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미국인들은 환호했다. 자신이 말한 바를 추진하지 못할 위인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통념상의 ‘이미지 관리’와는 거리가 멀고, 누구보다 확신을 담아 거칠고, 직설적이며, 강하게 주장을 펼치는 그는 다른 정치인들의 방해 공작에도 쉽게 굴복할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재산으로 최대한 손 벌리지 않고 대선 레이스를 이어 온 만큼 ‘공신’들의 영향력이 비교적 적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미국인들이 자신의 불만을 대변해 줄, 적격의 인물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표를 던졌다.
이것이 외형은 화려하고 그럴듯하지만 내부는 뒤틀려 있었던 미국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은 ‘위대한 개츠비’를 닮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모범적 미국’으로서 착한아이 콤플레스를 유지하기에는 현실의 힘이 너무나도 강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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