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황혜진 기자] 돈을 굴리는 특성 때문에 금융기관의 본점 건물 고르기는 풍수지리를 감안하는 경우가 많다. ‘조ㆍ상ㆍ제ㆍ한ㆍ서’(조흥ㆍ상업ㆍ제일ㆍ한일ㆍ서울)로 대표됐던 과거 한국의 대표은행들이 남대문로와 을지로에 집결했던 이유다. 공통적으로 청계천을 끼고 있는데 풍수적으로 물이 흐르는 것은 돈이 흐른다는 의미다. 청계천은 기가 좋다는 북악산, 인왕산, 남산의 물이 모여 흐르는 만큼 서울 물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다른 강, 하천과 달리 동에서 서가 아닌 서에서 동으로 물이 흐른다는 점도 특별함을 더한다.
▶터로 망한 은행들=하지만 구체적인 위치에 따라 은행의 흥망도 갈렸다. 대표적인 곳이 지금은 한국은행 별관인 옛 상업은행 본점이다. 이 건물은 삼각형 대지에 지어졌는데 소공로, 남대문로와 남산 3호 터널길이 마주한다. 특히 삼각형 모양의 모서리가 남산에서 뻗는 나쁜 정기를 정면에서 맞는 형상이라 풍수지리학자들은 터가 좋지 못하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이런 내용을 전해들은 정지태 전 상업은행장은 남산 3호 터널 쪽을 바라보고 있던 행장실 집기 배치를 북쪽 시청 방향으로 바꾸고 막아놨던 액운을 흘려보내기 위해 남문도 다시 텄다. 그래도 사고는 끊이질 않았다. 상업은행은 3호 터널이 개통된 이후 어음사기사건, 지점장 자살, 한양사태 등 굵직한 금융사고에 시달리며 1997년 IMF 이후 한일은행(현 우리은행)과 합병됐다. 우연의 일치인지 상업은행이 남문을 낸 이후 상업은행 본점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은행에서 사고가 잇따라 터졌다. 1995년 부산지점 헌돈 불법 유출사건부터 1996년 구미 사무소 현금 사기 사건까지 줄을 이었다.
상업은행이 본점을 옮긴 이후 이 건물은 한국은행에 인수됐다. 리모델링된 건물은 외관을 온통 유리로 마감하고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했다. 액운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상업은행 옆에 본점을 뒀던 옛 한일은행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도 풍수지리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 건물은 나중에 롯데그룹에 인수돼 현재 롯데 애비뉴엘로 쓰이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 맞은 편에 있는 옛 서울은행 본점(현 이비스호텔)도 금융회사로서는 터가 좋지 않다고 평가됐다. 가뜩이나 복이 없는 터인 데다 그나마 있는 복도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KB금융쪽으로 흘러 간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광교 사거리에 있는 옛 조흥은행 본점도 과거 건물 외관이 칙칙한 검은 색이어서 나쁜 기운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현재는 외관을 밝게 바꾸고 신한은행이 들어와있다.
옛 제일은행의 본점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공평동 100번지는 조선시대 서슬 퍼렇던 사정기관인 의금부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일제치하에선 종로경찰서가 위치했다. IMF직전 은행장 3명이 연달아 불명예 퇴진을 한 데다 한보 사건에 연루되면서, “이 곳에서 고문 등으로 생명을 잃은 원혼들 때문에 좋지 않은 일들이 줄을 잇는다”는 설이 파다했다. 결국 제일은행은 환란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된 데 이어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매각됐다. 지금은 이름도 잃고 SC은행으로 불린다. SC은행은 실적악화에 시달리다 최근 전 본점이었던 SC은행 충무로지점을 신세계그룹에 매각했다.
▶터로 흥한 은행들=서울 중구 회현동에 위치한 우리은행 본점은 터가 좋아 본점 이전을 하지 않은 경우다. 이 건물 터는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정광필(동래 정씨) 집터로 이 집안에서만 12명의 정승이 배출된 명당중의 명당이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해 탄생한 한빛은행(우리은행 전신) 시절 이 건물을 매각하려 했지만 굴착 당시 ‘금빛 흑’인 황금 마사토가 발굴되면서 이후 계속 본점으로 쓰이고 있다. 발굴된 황금 마사토는 현재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에 보관돼있다.
리딩뱅크 신한은행이 잘나가는 데도 터의 영향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신한은행은 한때 합병한 조흥은행 본점 자리에 새로운 통합 본점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바로 접었다. 현재 본점 자리가 대표적인 명당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돈을 찍어내던 전환국이 있었다. 사무공간이 부족해지자 본점 인근에 매물로 나온 빌딩을 사들이려 했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하나은행이 민간사채인 단자회사에서 충청, 보람, 서울, 외환 등 굵직한 은행들을 합병하며 자산 1위 은행으로 성장한 것도 을지로 본점의 명당 기운 덕이 작용했기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하나은행은 한때 여의도로 본점을 옮긴 뒤 어려움을 겪었으나 을지로로 복귀한 뒤 승승장구하고 있다. 하나금융은 현재 본점에 지상 26층, 지하 6층 규모의 신사옥을 짓고 있다. 내년 완공예정이다.
한동안 내분으로 힘들었던 KB금융이 지난해 1월 지주 본사를 여의도 은행 건물로 옮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KB금융은 통합사옥이 없이 명동(옛 국민은행 본점)과 여의도(옛 주택은행 본점) 등 4개 건물에 나뉘어 있다. 지주 회장은 명동, 은행장은 여의도에서 근무했다. 그래서일까. KB금융은 회장과 은행장 간 권력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내부갈등이 심했다. 지난 2014년 말 취임한 윤종규 회장은 은행장을 겸임하면서 지주 본점을 여의도 은행 건물로 옮긴 이후 내부갈등 잡음은 사라졌다. KB금융의 통합사옥 찾기는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여의도 IFC와 구 MBC 사옥, 광화문 서울파이낸스 센터가 물망에 올랐으나 막판에 모두 포기했다. 최근엔 GS건설이 시공한 건물(24층규모)이 낙점돼 통합사옥의 염원이 실현되나 했지만 풍수지리가 안 좋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