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흔히 만병의 근원에 비유된다. 만병이 꼭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그만큼 스트레스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일 게다. 하지만, 어디 스트레스 없이 살 수 있나. 일, 건강, 돈, 승진, 시험, 사교, 취미 등 온통 스트레스를 주는 일 투성이다. 생계비, 보ㆍ교육비, 주거비, 통신비, 의료비 등이 주는 부담은 또 어떤가. 말 그대로 인생은 ‘고해’, 즉 스트레스의 바다다.
정치의 역할에 대해 이런저런 정의가 있지만,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정치가 잘 작동해서 미친 전세를 잡고, 사교육의 부담을 줄여주면 그만큼 겪어야 할 스트레스가 줄어들 것이다. 비록 계량화할 수는 없지만 한 사회의 스트레스 총량이란 게 있다면, 그것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은 정치에 달려 있다. 정치가 잘 돌아갈수록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당연히 적어진다.
반대로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삶의 불편함과 고단함, 그리고 억울함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불평등이나 양극화 따위도 결국 정치의 산물이라는 것이 노벨상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나 존 스티글리츠의 지적이다. 그만큼 삶의 스트레스는 정치의 질에 달려 있다. 그런데 가장 최악은 정치 그 자체가 스트레스인 경우다. 정치 때문에 스트레스가 삶의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치가 곧 스트레스인 것이다.
며칠 전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정당의 당대표, 원내대표가 만나는 5인 회동이 있었다.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의 모임인데, 눈에 띄는 건 좀스러운 싸움뿐이다. 당의 대변인을 배석시킬지를 가지고 다투고, 모두 발언을 공개할지를 놓고 티격태격했다. 스마트폰으로 녹음해도 되느냐고 물으니 청와대를 뭐로 보느냐며 받아쳤다. 회담 끝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종걸 원내대표의 말실수를 따지는 ‘뒤끝 작렬’까지 있었다. 이쯤 되면 정치 지도자 간의 깊이 있는 토론이나 상대를 배려한 경청, 적절한 타협은 먼 나라 얘기다.
이런 모습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우울해진다. 이제 정치 그 자체가 스트레스의 대상이 됐다. 어쩌면 삶의 스트레스 중에서 정치적 스트레스가 제일 클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적 스트레스는 상당한 부작용을 낳는다. 국민이 정치를 외면하게 된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되면 정치는 가진 자들의 잔치,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 일부의 의사가 과잉대표 되고, 다수의 의사가 과소대표 되는 정치에서 옳은 결정이 내려지기 만무하다.
정치적 스트레스 때문에 정치와 국민 간에 불화가 깊어지고 소통이 멀어지고, 그렇게 되면 정치인들은 정책보다 뉴스 만들기에 나서게 된다. 멋진 정책과 좋은 법률로서 승부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언론에 이름 한 번 더 나오게 할지에 목을 매게 된다. 미디어 노출에 먼저 관심을 두게 되면 중요한 것은 이벤트나 쇼맨십이다. ‘정치력(statecraft)’이 아니라 ‘연출력(stagecraft)’이 대접받는 정치는 나쁜 정치다.
정치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역설적으로 국민이 그 스트레스를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 열심히 투표하는 건 기본이고,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지켜보고, 정치의제의 시비와 우열을 잘 살펴야 한다. 내가 정치를 기피한다고 해서 내 삶이 정치가 내리는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요컨대 그 누구도 정치의 그립(grip)을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답이다. 좋은 정치가 펼쳐지도록 하려면 유권자, 즉 주권이나 권력을 가진 시민으로서 부담해야 할 역할은 즐겁게 수행해야 한다. 열심히 관찰하고, 잘잘못을 분별하고, 선거 때 응분의 책임을 묻어야 한다. 몸이 찌뿌듯할 때 땀 흘리는 운동을 하고 나면 좋아지듯 정치가 그렇다. 깨어 있는 시민으로, 참여하는 유권자로서 두 눈 부릅뜨고 참여할 때 정치적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다. 정치적 스트레스를 정치적 ‘해피니스’로 바꾸는 건 우리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다. 뭘 주저하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