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역시 대단하다. 정부의 방심과 무능으로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파동을 국회법 정국으로 일거에 바꿔 놓았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싸늘한 표정으로 ‘배신의 정치’을 말하는 대통령의 얼굴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정치권 전체를 싸잡아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는 구태정치”의 원흉으로 몰아붙였다.

정국반전에는 성공했다. 언론에서 메르스는 사라지고 다시 정치권 이야기로 가득 찼다. 국회법 개정안 재의는 어떻게 될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대표직을 사퇴할지 말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어떤 입장을 취할지, 이들의 거취가 당내 권력구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특히 이번 기회에 친박이 당내 주도권을 장악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온갖 추론과 분석이 난무했다. 심지어 박대통령의 탈당설과 정계개편설까지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그만큼 지난 25일 대통령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일단 국회법 개정안은 대통령 의도대로 될 것 같다. 대통령의 분노에 바짝 엎드린 여당 의원들이 서둘러 표결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배반자’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공격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의 여당 군기잡기가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 대통령의 의도 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사실 이번 파동의 본질은 대통령의 국정주도권 장악이다. 내년 총선이 끝나면 대통령은 실질적인 레임덕에 들어갈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에서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여당이 대통령으로부터 이탈해 나가는 것을 이번 기회에 막겠다는 것이다.

우선 청와대의 ‘유승민 찍어내기’는 성공할 것 같지 않다. 여당 내 반발이 만만찮고 여론도 부정적이다. 가장 중요한 대구 지역분위기도 대통령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한 여론조사 결과 이 지역 응답자의 58.2%는 친박계의 유승민 사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이 도와주는 한 유 의원은 원내대표직을 고수할 것이다. 설령 유 의원이 사퇴한다 해도 친박계가 당내 주도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미 수차례 당내 선거에서 비박계가 늘 이겨왔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국정전반에 걸쳐 국회의 협조를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비협조는 말할 것도 없고, 여당인 새누리당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국회의원들은 행정부의 시행령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여러 차례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되었고, 박 대통령도 국회의원 시절 필요하다고 인정한 부분이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부분의 여당 의원들이 찬성한 것도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여당을 무시한 만큼 여당 역시 정부를 무시할 것이다. 특히 대통령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비박계 의원들이 선거를 앞둔 마지막 국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더욱 목소리를 높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들의 마음이다. 그들이 대통령을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에서 메르스로 이어지는 국가위기의 핵심에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놓여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아무런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남 탓만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5일 대통령 발언의 진실은 날선 분노가 아니라 독선과 무책임이었다. 국민들은 그것을 더 무섭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이다. 국정주도력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탓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국민이 믿어주지 않고 국회가 도와주지 않는 상황을 만든 것은 정치권이 아니라 대통령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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