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평균나이 50세, 가슴 속엔 여전히 20대를 품고 산다. 절정에 올라봤고 환호와 좌절, 성공과 실패를 겪어본 나이, “인생을 다시 한 번 알아가고”(김혜선ㆍ47), “나만 바라보던 시절을 지나 주위를 살필 수 있는”(강수지ㆍ49) 나이다. “시간의 소중함”(김국진ㆍ51)을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리다 뒤를 돌아볼 수 있는”(김동규ㆍ53) 여유도 생겼다. 오랜 연예계 생활에서 크고 작은 풍파를 견뎌내니, 세상을 향한 시선이 너그러워진다.

지난 25일 오전 10시, SBS ‘불타는 청춘’에 출연 중인 10명의 중년 연예인들이 서울에서 3시간 30분을 달려 전라북도 고창에 도착했다. “정서적으로 설렘을 줄 수 있고, 낡고 험하더라도 개발이 덜 된 장소”(박상혁 PD)를 찾아다닌다는 ‘불타는 청춘’은 일곱번째 여행지로 ‘삼태마을’을 정했다. 몇 주 전 영화 ‘집으로’의 공간을 찾았던 영동 편(26일 방송분)과는 달리 이번엔 우아하게 자리잡은 고택이다.

▶ 작위성 사라진 자연스러움의 힘…“형, 마음대로 해!” =2주에 한 번 떠나는 1박2일 여행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출발시간도 도착시간도 제각각, 먼저 오는 사람 순서로 마이크를 차고, ‘숙소’를 둘러본다. ‘싱글’의 중년스타들은 숫자만 쌓아갔지 아직도 청춘이다. 복분자와 장어가 유명한 고창에 모이자, ‘15금(禁)’ 예능 프로그램은 ‘19금’ 토크쇼 ‘마녀사냥’의 아성에 도전한다. 제작진이 특별히 준비한 ‘오줌 싸는 소년’상을 지켜보던 김일우 김국진은 고작 동상 하나로 수십 분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재주도 지녔다. 지켜보던 강수지는 “남자들은 역시 장난꾸러기”라며 혀를 내두른다.

집안 구석구석 설치한 거치카메라만 해도 15대에 달하는 CCTV 같은 관찰예능 안에서 이들은 카메라를 의식하는 기색도 없다. “처음엔 너무 많은 카메라를 보고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김혜선)는데, 그 카메라 아래에서 왕년의 ‘여신’들은 옷을 갈아입고, 맨얼굴로 돌아다닌다. 화학조미료가 없어 다소 심심할 수 있는 그림을 이끌어가는 힘은 작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중년스타들의 자연스러움이다. 프로그램의 연출을 맡은 박상혁ㆍ이승훈 PD와 김윤영 메인작가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마음대로 하세요”, “그냥 놔둬보지 뭐”, “형, 하고싶은 거 해요” 정도다.

“나이 탓에 24시간 카메라가 돌다가도 10분 정도씩의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박상혁 PD)지만, “대학시절 MT에 온 기분”(서태화ㆍ49)으로 찾은 곳에서 출연자들은 체력도 20대로 돌아간다. 복분자 밭을 활보하다, “장마전선이 북상하는”(김국진) 갯벌에서 재래식 장어잡이에도 한창이다. 지칠 법도 하지만 50대 중년스타들은 피곤한 내색도 없다. 카메라 사각지대에서도 출연자들은 ‘불타는 청춘’의 연장이다.

▶ 몰랐던 스타의 얼굴…‘상남자’ 김국진, ‘책받침 여신’ 버린 김혜선=짜여진 틀을 벗어나자 수십년을 보고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스타들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게 됐다. “물 흐릇듯 티 안나게, 이야기하듯 만들어가는 예능”(김국진)이기에, 스타들은 평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튜디오 예능에 익숙했던 김국진은 야외로 나오자 ‘상남자’가 됐다. 운동, 게임 뭐 하나 못 하는게 없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고,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그런(남자다운) 모습인데, 방송에선 약해보이기도 하나 보다. 이 곳에 와서 이것 저것 하다 보니 은연 중에 평소의 모습이 나온다”(김국진)고 한다.

김국진은 프로그램 속 유일한 ‘예능인’이기에 PD와 작가에게 진행상황을 종종 확인하지만, 이 현장은 어디로 향할지를 모른다. “장소 옮길게요!” 스태프가 소리를 높여도 제작진의 평균 나이보다 20년을 뛰어넘는 형님, 누나들은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책받침 여신’으로 군림하던 배우 김혜선은 “마음대로 하라니까 마음이 풀어져 스스로도 놀랄 만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워낙에 내성적인 성격이긴 해도 친구들과 있으면 분위기는 적당히 맞출 줄 알았는데 방송에선 보여줄 일이 없었다“는 그는 ”연기자는 틀에 맞춰 주어진 역할을 하다 보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별로 없다. 수십년 연기 생활을 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던 흥에 겨운 모습이 나온다”고 했다. 덕분에 엄마와 동생은 “내숭 좀 떨라”고 핀잔을 주고, 새로 생긴 2030 팬들은 “소주 한 잔 하자”며 러브콜도 보낸다.

여신이 웬 말, 가수 강수지는 청순가련 대신 ‘리액션의 여왕’으로 등극했고, 배우 김일우는 별명 제조기가 됐다. ‘통편(집) 일우’를 넘어 ‘불운의 아이콘’, ‘지루한 김일우’에 이어 ‘집착남’의 모습까지 비친다. “드라마를 찍을 때도 게시판을 종종 봤는데, ‘불타는 청춘’을 하면서도 찾아보니 지루하다는 반응이 있었다”는 김일우는 그 ‘지루함’을 벗기 위해 집요하게 재미를 찾아다녔다. “너무 집착하는 것 같지 않아? 이젠 거들남(거들먹거리는 남자) 할까봐.”(김일우)

“예능 PD들에겐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데 ‘불타는 청춘’에선 “캐릭터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박상혁 PD는 이야기한다. 함께 모여 놀다 보니, 출연자들 스스로가 별명을 만든다. 제작진은 다만 ‘편집’으로 거든다. 대여섯 명의 PD가 동원돼 일주일 내내 한 회분을 만든다. ‘편집의 묘미’ 덕에 백두산의 김도균은 “요즘 사람들한테 드라마 잘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드라마 PD의 덕목인 ‘감정의 흐름을 끌어내는 것’이 ‘불타는 청춘’ 안에 녹아났기 때문이다. 이승훈 PD는 “현장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장면까지 돌려보며 매회 주인공을 만들어 스토리를 쌓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라진 ‘스타의 무게’…내려놓으니 말할 수 있는 것=‘자기검열’에 철저한 연예인이다 보니 속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출연자들은 ‘스타의 무게’를 내려놓고, 제작진에게 모든 걸 맡긴다. “마이크가 달려있다는 것도 잊은 채 이야기를 해도 제작진인 알아서 편집을 하리라 생각한다”(김혜선)는 것이다. 박상혁 PD는 실제로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워낙에 거침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인생 이야기를 하는데, 적절히 수위를 조절한다. 과감히 버리는 부분도 많다”고 말했다.

시간을 거슬러 달려간듯 마음 속 소년 소녀를 꺼내놓을 수 있었던 건 ‘불타는 청춘’을 통해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 친구가 별로 없다”는 김동규도, “여럿이 모여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익숙한” 김국진도, “마음의 문을 닫고 어울리는 사람들끼리만 만나왔던” 김혜선도 같은 시간을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마음의 문’을 연다.

김국진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연예계의 흐름, 흔히 말하는 좋고 나쁜 걸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그저 편안하게 대화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만 시키고, 정작 가장 적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승훈 PD는 “국진이 형이 누군가와 어울릴 수 있는 자리에 나온 것만도 변화”라고 말한다.

“이 곳에 와서 같이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기도 해요. 촬영할 땐 흥분이 되고, 촬영을 마치고 집에 오면 다시 촬영날을 기다리게 돼죠. 같이 지내보니 그래요.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즐거워지고, 다시 오고 싶고, 뭔진 몰라도 이야기 하고 대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네요.”(김국진)

▶ 독성 없는 인생이야기…시청률 상승의 힘=‘불금(불타는 금요일)’ 심야시간대 방송되지만, 시청률도 부쩍 뛰어 지난 26일 방송분에선 5.8%(닐슨코리아 집계, 전국 기준)를 기록했다.

박상혁 PD는“중년은 많은 것을 이뤘지만 성공을 향한 집착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는 나이다. 인생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얻었지만 몸은 예전같지 않고, 주변에선 선생님으로 보기 시작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가 ‘불타는 청춘’”이라고 말했다.

중년의 스타들과 추억여행을 떠난다 해도 중년만을 위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젊고 섹시한 톱스타도 없고, 앞으로도 대세 청춘스타를 섭외하겠다는 생각은 없다”는 박상혁 PD에게 ‘불타는 청춘’은 “중년스타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통해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은 세대공감 버라이어티“라는 생각이다. “나이는 많지만 마음은 여전히 젊고 순수한 청춘들을 보면서 함께 설레고, 그들의 여유로움을 통해 공감대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성 없는 중년스타들의 ‘인생이야기’에 벌써 마니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성악가 김동규는 “50대는 불안한 세대다. 60년대에 태어나 가장 많은 급변을 보고 겪었다. 6.25를 겪은 선배 세대와 한 발 앞서간 젊은 세대 사이에 끼인 어중간한 세대”라며 “우리 또래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방식을 보여주고, 잠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프로그램을 통해 마련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혜선은 ‘불타는 청춘’ 이후 오래전 팬들을 다시 만났다. “최근 페이스북을 시작했는데, 예전에 팬레터를 보냈던 친구들이 페이스북으로 돌아와 그 때의 감정을 이야기하곤 한다“며 ”방송에선 아픈 모습도 보이고, 차가울 줄 알었던 사람에게서 소탈하고 서민적인 모습이 비치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공감해주는 것 같 같다”고 했다.

고창=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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