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서는 흔히 대가와 신인을 구분한다. 예술에서 대가와 신인의 구분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가는 잘 알려졌지만 신인은 그렇지 않다. 음악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라면 누구나 아는 대가지만 지금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의 신인은 관계자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신진 예술가들은 처음에는 대개 대가나 기성 예술가를 모방하지만 점차 자신의 예술 색깔을 찾아 독립적으로 창작한다. 그렇게 되면 그도 더 이상 신인이 아닌 기성 예술가가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술의 창조성은 계속되고 대중에게도 예술의 영역은 살아 있게 된다.
필자가 최근에 경험한 한 연주회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 연주회는 선후배의 협력을 통해 비올라 연주 역시 창조적이고 독립적 예술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처럼 예술에서 진정한 대가 혹은 선배는 신진 예술가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는 모범이지, 신진을 지배하고 종속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그랬다면 예술에서 창조성은 실종되고, 결국 예술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이 대가의 예술가 정신이다.
기업에도 대가와 신인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업지형도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하청기업이라는 또 다른 기업이 존재한다. 수많은 하청기업은 규모로 보면 대체로 중소기업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적지 않은 경우 대기업에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기생적 중소기업의 모습을 보인다. 대기업은 기존의 완제품은 물론 신제품을 만들 때에도 하청기업을 필요로 한다.
만약 대기업의 요구에 따라 하청기업들이 납품단가는 물론이고 납품하는 제품의 생산 방식, 심지어 제품 자체를 언제라도 바꿔야 한다면, 하청기업은 기업이라 할 수 없는 대기업의 부속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중소기업과 하청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실상은 우려스럽다.
대기업과 주종관계로 기생하는 다수의 중소기업 내지 하청기업이 한 단위로 움직이는 대기업 독점 구조는 한 사회의 경제 토대를 허약하게 만들고, 자본의 신진대사를 막는다. 사실상 여기서는 자본과 자본가는 존재하되 진정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근대 서양 자본주의가 발전한 이유를 진단한 막스 베버는 그 이유로 끊임없는 재투자를 위한 부의 취득과 직업적 노동을 강조하는 금욕적 직업윤리를 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인정을 받는 부의 취득과 투철한 기업가 정신이 서양의 초기 자본주의를 살린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그가 비웃은 고대 중국이나 인도의 몰락한 자본주의에는 자본과 자본가만 있었지 자본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업가는 없었다. 그의 진단이 서양 중심적 시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고, 그것은 일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통찰력이 빛나는 곳은 자본주의 정신과 기업가 정신을 연관시킨 지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업가가 단순히 자본의 취득만을 목표로 하는 자본가로 전락한다면 그 자본주의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고, 자본주의는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다.
예술가 정신이 없는 예술에서 창조성이 존재할 수 없듯이, 기업가 정신이 없는 자본주의에는 탐욕적 자본만 존재할 뿐이다. 탐욕적 자본은 사회가 마시는 독배(毒杯)와 같다. 막스 베버가 말한 기업가 정신은 하청중소기업에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고, 그런 하청기업을 거느린 대기업에도 없다. 지금 우리 경제에 필요한 것은 자본이나 돈보다도 기업가 정신으로 만드는 공생적 기업생태계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중소기업과 하청기업들은 기업가 정신을 갖춘 자립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대기업은 중소기업과의 합리적 역할 분담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우리의 대기업이 그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 자본주의의 미래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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