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여전히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죠. 역사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는데요. ‘세계전사 엿보기’에선 ‘넓고 얕은 지식’이라도 인류가 치러야 했던 전쟁이 전하고자 했던 여러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전해드릴까 합니다.

[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참호 밖을 나간 병사들이 5m도 채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기관총 소리와 함께 곧 함성 소리는 잦아듭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지휘관은 전령을 보내 무의미한 공격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결과를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합니다. 젊은이들은 그렇게 또 쓰러집니다.

마지막 공격만 남았습니다. 병사들은 최후의 기도를 합니다. 전령은 공격 중단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립니다. 전우들의 목숨은 그에게 달렸습니다.

1915년 3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려는 해군의 단독작전은 실패했습니다. ‘2주 안에 이스탄불을 점령하겠다’는 호언장담은 윈스턴 처칠 해군성 장관의 굴욕으로 바뀌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4월부터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확대됐습니다. 더 큰 참사의 시작이었죠.

1915년 안자크만에 상륙하는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1915년 안자크만에 상륙하는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1915년 안자크만에 상륙하는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1915년 안자크만에 상륙하는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그해 4월 25일, 이안 해밀턴 장군의 지휘아래 호주ㆍ뉴질랜드 연합군(ANZAC)을 비롯, 영국과 프랑스군으로 구성된 7만8000명의 연합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합니다.

윌리엄 버드우드 장군 휘하 ANZAC군은 호주군 1사단과 뉴질랜드-호주사단으로 구성됐습니다. 영국군 29사단, 왕립해군사단, 프랑스 동방원정군과 함께 싸웠죠.

안자크만의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안자크만의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오스만제국은 연합군의 상륙을 막기위해 오스만 제5군을 투입합니다. 지휘관 상당수가 독일군 출신으로, 오토 리만 폰 산더스 장군이 이들을 이끌었죠. 이들 중 오스만군 19사단은 후에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34세의 ‘터키의 국민영웅’ 무스타파 케말이 지휘했습니다.

전투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ANZAC군은 3보병여단을 선두로 가바 테페를, 영국군 29사단은 헬레스곶을 각각 공략했습니다. 그러나 안자크만에 상륙한 ANZAC군은 200명에 불과한 수비대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져 갔습니다. 첫날 투입된 1만6000명 가운데 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죠.

헬레스곶에선 최초 상륙에 투입된 200명 가운데 21명만 해안에 닿을 정도로 어려운 싸움을 했습니다. ‘W’해변에 내린 영국군 랭커셔 부대는 1000명 중 600명의 사상자를 냈고 ‘V’해변에 상륙한 병력은 사상자가 70%에 이르렀죠.

어렵사리 해안을 확보한 연합군은 상륙군의 합류와 내륙지역 진출을 위해 여러차례 크리시아(Krithia) 함락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강력한 저항에 맞닥뜨리면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실패하죠. 불리한 지형과 지휘부의 무모한 공격명령으로 불과 수백m를 전진하기 위해 수천명이 사망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ANZAC군의 비극은 8월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연합군은 거듭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8월 수블라만에 대규모 병력 전개를 결정합니다. 지휘부는 아일랜드 10사단과 11사단으로 구성된 영국군 4군단의 수블라만 상륙을 위해 교란작전을 계획하고, 뉴질랜드 보병여단과 네크(Nek)에 주둔하고 있던 호주군 3경기병 여단에 추누크 바이르(Chunuk Bair) 공격을 명령합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작전계획과 달리 포병의 엄호사격이 7분 일찍 종료됐고, 이는 오히려 오스만군에 좁은 전면에 공격이 있을 것이란 사전경고를 한 셈이됐죠. 미리 기관총 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린 오스만군에게 무작정 돌격하는 연합군은 손쉬운 상대였습니다.

영국군의 수블라만 상륙은 별다른 피해없이 끝났지만 아무런 의미없는 ANZAC군의 시선끌기 공격은 막대한 피해만 남겼습니다. 이 전투는 피터 위어 감독의 작품 ‘갈리폴리’(Gallipoli, 1981)로도 영화화됐죠.

수블라만에 상륙후 공세행동을 개시한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수블라만에 상륙후 공세행동을 개시한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수블라만 병력증강과 8월 공세에도 아무런 진전없는 참호전은 계속됐습니다. 10월 해밀턴 장군은 병력의 증원을 요청했지만 내부에선 갈리폴리 공격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일었고, 새롭게 사령관으로 부임한 찰스 먼로 장군이 11월 지중해를 방문한 허버트 키치너 영국 전쟁성 장관에게 철수를 제안하면서 1차대전의 또다른 비극은 마지막을 향해 갑니다.

수블라만에 상륙후 공세행동을 개시한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수블라만에 상륙후 공세행동을 개시한 연합군. [사진=게티이미지]

이듬해인 1916년 1월, 마지막 부대가 철수할때까지 연합군은 55만 명이 넘는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그동안 사상자는 25만 명에 달했죠. 3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터키도 최대 25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났습니다.

영국군 사망자는 3만4000여 명, 프랑스군은 1만 명이 넘었습니다. 호주군은 8709명, 뉴질랜드군은 2721명, 인도군은 1358명이 전장에서 쓰러져 갔습니다. 이들 가운데엔 나이를 속이고 입대한 십대 소년들도 있었죠.

막대한 인명피해는 1차대전 당시 일반적인 전술이었던 참호전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포병의 일제사격 후 적 참호를 향해 돌진하는 단순한 공격방법으로 공격측은 막대한 사상자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갈리폴리의 불리한 지형은 연합군으로 하여금 고지를 점령하도록 해 처음부터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죠.

갈리폴리 전투가 실패로 귀결되며 2차대전에서 여러 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전까지 전략가들 사이에서 상륙작전은 상륙군에 불리하며 어렵다는 견해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와 함께 동부전선에서 독일을 압박하려는 연합군의 전략은 실패했습니다. 제정 러시아가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몰락하면서 실현되지 않았지만 미국이 참전하면서 1차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죠.

연합군을 지휘한 영국군 이안 해밀턴 경. [사진=게티이미지]
연합군을 지휘한 영국군 이안 해밀턴 경. [사진=게티이미지]

어느덧 갈리폴리 전투는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남아있지 않죠. 그러나 호주는 이듬해인 1916년부터 ANZAC군이 갈리폴리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4월 25일을 현충일인 ‘앤잭데이’로 삼아 전쟁으로 숨져간 젊은이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앤잭데이. [사진=게티이미지]
앤잭데이. [사진=게티이미지]

사라예보 사건으로 1차대전이 촉발됐고 발칸반도는 한때 ‘유럽의 화약고’라 불릴만큼 분쟁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은 인근 우크라이나로 유럽 분쟁의 중심축이 옮겨간 모양새지만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보스포러스 해협은 여전히 전략적 요충지임에 분명합니다.


ygmo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