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 용산·동작=권지나 기자]서울의 핫 플레이스로 꼽히는 이태원은 평일이나 주말 할 것 없이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로 북적인다. 그렇다면 이태원에 외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이태원의 유래부터 시대별 변화모습을 되짚어봤다.현재 사용되고 있는 이태원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효종때 동네에 배 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명명한데서 유래했다. 또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점에서 이타인으로도 불리기도 하고, 왜군에게 치욕을 당한 이 지역의 사찰 운종사의 여승들과 부녀자 및 그 아이들을 지어 정착케 했다고 전해져 혼혈인의 거주지라는 의미에서 이태원이라 불렸다. 이태원은 조선초기부터 공무수행 관리와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키 위해 숙소로 설치된 한양4원(동쪽의 보제원과 절관원, 서쪽의 홍제원, 남쪽의 이태원) 중 하나로 도성 남쪽에 설치된 숙박시설이었다. 여기서 원(院)이란 고려시대 전성기를 맞은 주로 사찰들이 운영하는 노변숙박시설을 가리킨다. 이태원은 ‘영남대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첫 원터였다. (남대분-이태원-서빙고-동작진-과천으로 해서 남쪽지방에 이르는 길목)이태원의 본래 위치는 오늘날의 이태원 거리와 상관없는 현 용산중고등학교 자리였다. 이태원동 마을은 원래 현 이태원 2동 중앙경리단 주변이었고, 이 부근에는 지금도 이태원 부군당이 남아 있으며 ,매년 당제가 열린다.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남산기슭에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이태원’의 중심은 구 이태원 마을자리로부터 해밀턴 호텔을 중심으로 현 위치로 옮겨오게 됐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기사 등 군사 관련시설이 많았으나, 일제시대에 들어 용산, 남영동 등이 군용지로 책정돼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입지했고(현 미8군자리), 구 군인아파트(현 남산2호터널 입구, 대림아파트 단지)가 일본군의 사격장으로 이용되면서, 이태원은 군사지역의 색채가 진해졌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서울 주둔 미군기지로서 군사지역의 면모를 강화했고, 이들을 위한 구멍가게나 가건물 주점, 기지촌 들이 들어서면서 미군위락지대로 변모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인근에 ‘해방촌’이 형성됐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이태원동, 한남동에 외국공관이 들어서고 1963년 사격장터에 군인아파트가 건설되고 외국인 집단거주지가 형성되면서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에는 생활용품과 잡화류 이주의 상가들이 존재했다. 1970년대 초반 121후송병원이 부평에서 미8군 영내로 이전하면서 1만여명의 미군과 관련종사자 및 기지촌 상인(현 상인의 30% 차지)이 이주하면서 현재 모습의 이태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엔 섬유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이태원은 값싸고 특색 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쇼핑가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값싼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공급지 역할을 하게 됐다.
1980년대에는 각종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이태원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일본인을 위시한 많은 관광객들의 관광쇼핑과 유흥위락의 쇼핑관광명소가 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태원은 피혁제품과 염가브랜드의 거리로서 외국인들의 쇼핑투어에 반드시 포함되는 지역이 됐고 밤에는 역시 외국인을 위한 유흥업이 번성하게 됐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 홍콩, 중국, 동남아, 아프리카, 중동지역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이태원은 미군 중심의 거리에서 세계인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고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이태원은 세계인의 관광특구로서 전통과 현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혼재하는 ‘퓨전’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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