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몇 년 간 들고 고민 중이었는데 고민되네요. 악재 기사까지 뜨는 와중에 지금 빼는 게 맞을까요?” (온라인 주식 거래앱 커뮤니티)
인공지능(AI) 랠리 대장주 엔비디아 주가가 하루에만 10% 가까이 폭락했다.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높아진 시장의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상황 속에 미 제조업 지표 악화로 인해 8월 초 글로벌 증시를 휘감았던 ‘R(Recession, 침체)의 공포’가 또다시 고개를 든 여파다. 엔비디아의 약세 속에 주요 반도체주가 일제히 우하향 곡선을 그렸다는 소식은 국내 증시 시총 1,2위를 기록 중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주가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3일(현지시간) 미 뉴욕증시에서 엔비디아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9.53% 폭락한 108.0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이로써 시총 규모도 2조6490억달러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장 종료 후 진행 중인 시간 외 거래에서도 엔비디아 주가는 2%대 하락세를 보이며 주당 105달러 선까지 후퇴한 상황이다.
미 증시 대표 반도체 지수인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도 이날 7.75%나 급락한 4759.00을 기록했다. 이날 지수를 구성하고 있는 30개 전종목이 하락세를 기록했다. TSMC(-6.53%), 브로드컴(-6.16%), ASML(-6.47%), AMD(-7.82%), 텍사스인스트루먼트(-5.84%), 퀄컴(-6.88%),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7.04%), 마이크론(-7.96%), 인텔(-8.80%) 등 주요 반도체주의 하락세도 뚜렷했다.
머피&실베스트 웰스 매니지먼트의 폴 놀테 시장 전략가 겸 선임 자산 매니저는 엔비디아의 실적 발표 이후 초조함이 매도세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가치주를 향한 로테이션(회전) 역시 이 같은 약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엔비디아와 AI 주식은 한동안 시장의 별과 같은 존재였고 당분간 한발 물러서는 것도 놀랍지 않다”며 “모든 지출에 대한 투자 수익률(ROI) 관련 의문이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 일부에서는 AI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계속될 수 있을지와 이와 같은 투자가 충분한 과실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블랙록의 전략가들은 이날 보고서에서 “최근 연구 결과는 AI 자체 매출이 결국 이 같은 자본 지출의 물결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며 “개별 기업의 AI 투자를 평가할 때 투자자들은 대차대조표와 자본을 최선으로 활용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트리플 디 트레이딩의 데니스 딕 트레이더는 “9월은 계절적으로 매우 약한 달이고 사람들이 초조해하는 것 같다”며 “AI 랠리가 끝났다고 보지는 않는다”면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국 법무부가 엔비디아의 반독점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소환장을 발부한 것도 악재다. 3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은 소식통을 인용해 법무부가 AI 반도체 시장을 독점하는 엔비디아를 조사하기 위해 엔비디아와 다른 기업들에게 소환장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반독점 당국은 엔비디아가 고객사들이 다른 공급업체로 전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자사의 AI 반도체를 독점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고객사들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이날 반도체주의 약세엔 미 제조업 지표 악화 조짐도 한 몫 거들었다.
3일(현지시간) 미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전장 대비 무려 626.15포인트(1.51%) 하락한 40,936.93에 거래를 마쳤다. 대형주 벤치마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전장보다 119.47포인트(2.12%) 내린 5,528.93,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종합지수는 전장보다 577.33포인트(3.26%) 떨어진 17,136.30을 각각 기록했다. 중소형주로 구성된 러셀2000지수도 3.09% 밀렸다.
미국 공급관리자협회(ISM)에 따르면 8월 ISM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7.2을 기록하며, 예상치(47.5)를 소폭 밑돌았다. PMI가 50보다 높으면 경기 확장, 50보다 낮으면 위축을 의미한다. 전월(46.8) 대비 소폭 상승하긴 여전히 위축 국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ISM 제조업 PMI는 5개월 연속 50 미만을 기록하고 있다.
S&P 글로벌이 같은 날 발표한 8월 미국 제조업 PMI 역시 위축 국면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S&P글로벌의 8월 제조업 PMI는 47.9를 기록해 전월(49.6)에 비해 뚝 떨어졌다. 전망치(48)와는 유사했다.
픽테트 자산관리사 수석 전략가 아룬 사이는 “오늘 시장은 우리가 경제 침체 공포를 너무 금새 잊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고 평했다.
블루칩 트렌드 리포트의 수석 기술 전략가 래리 텐타렐리는 “지금 시장은 들어오는 모든 데이터에 매우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데이터 의존성이 매우 높은 시장이 돼있다”고 말했다.
하루 뒤인 4일에는 미국 노동부가 7월 구인·이직 보고서(JOLTs)를 내놓는다. 이어 오는 5일에는 8월 민간 고용 보고서와 서비스업 PMI, 오는 6일에는 8월 비농업 부문 신규 고용 지표와 실업률이 각각 발표할 예정이어서 시장 참가자들의 관심이 집중돼있다.
시카고파생상품거래소그룹(CME Group)의 페드워치(FedWatch) 툴에 따르면 이날 마감 시간 기준, 연준이 오는 9월에 금리를 25bp 인하할 확률은 61.0%, 50bp 인하 확률은 39.0%로 반영됐다. 경기침체 우려가 되살아난 영향으로 50bp 인하 가능성이 전장 대비 9%포인트 커졌다.
한편, 미 증시의 전반적인 약세는 국내 증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전날 코스피 지수는 전날보다 0.61% 내린 2664.63에 장을 마쳤다. 지수는 전날보다 2.12포인트(0.08%) 오른 2,683.12로 출발해 장 초반 2,690대로 올라섰지만, 오름폭을 줄이다 하락 전환해 2,660대로 내려앉았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장 후반 2909억원 순매도로 전환하면서 지수를 끌어내렸다. 기관은 2402억원 순매도했고, 개인은 5118억원 순매수했다.
코스닥 지수는 전장 대비 8.84포인트(1.15%) 내린 760.37에 마감했다.
거래대금은 유가증권시장이 8조7994억원, 코스닥시장이 6조7137억원으로 평소보다 줄었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거래대금이 부족한 가운데 외국인이 순매도로 돌아서면서 상승폭을 반납했다”며 “이번 주 발표될 미국의 고용지표를 앞두고 오후 장에 전반적으로 경계감이 유입됐다”고 분석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전날 국내 증시가 약세를 보인 이유로 8월 ISM PMI 지표에 대한 관망세가 유입된 것이 꼽혔던 만큼, 부정적 시그널이 확인된 상황 속에 증시엔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짚었다.
한편, 국내 증시 시총 1위 삼성전자와 2위 SK하이닉스 등 반도체주의 약세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7만2500원)와 SK하이닉스(16만8300원)의 주가는 ‘검은 금요일(8월 2일)’, ‘검은 월요일(8월 5일)’로 불렸던 대폭락세 직후 회복세가 시작됐던 시점 수준까지 주가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