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작가 파토 보시치 국내 첫 개인전
회화·드로잉 68점 내달 3일까지 전시
18살 나이에 고향인 칠레를 떠나 홀로 스위스, 독일, 헝가리 등 유럽 전역을 여행하던 소년은 영국 런던에 머물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같이 영국국립미술관과 대영박물관을 오가며 그곳에서 만난 그림과 조각을 관찰했다. “제겐 유럽 전통의 모든 시대와 예술가가 현대적입니다.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저는 그들을 제 서커스에 초대하죠.”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칠레 작가 파토 보시치(46)의 국내 첫 개인전 ‘마술적 균형: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것, 꿈의 풍경과 영혼의 상징적 지형을 가로질러서’가 서울 종로구 선화랑에서 2일 개막했다. 남미의 대자연과 유럽의 문명이 만난 그의 그림에는 아슬아슬한 균형 잡기를 시도하는 곡예사를 상징하는 작가만의 모티프가 한꺼번에 배치돼 있다. 그가 축적해온 문화적 경험과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메타포(은유) 그 자체가 돼 발화한 것이다.
장발에 턱수염을 한 작가는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떠올리게 하듯 “난파한 배가 해안 가까이 떠밀려 온 것처럼 런던에 정착하게 됐다”고 했다. 쾌활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이따금씩 농담도 던졌다. 그의 첫인상이 ‘오픈 마인드(open mind)’였던 이유다. 그의 추상적 풍경화에서는 역동적이며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힘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노마드적 삶을 추구한 작가의 생의 궤적과 닮았다.
화면에는 거친 야생마 몸체의 일부가 자주 등장한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이상을 꿈꾸는 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그리스를 거쳐 로마,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등장한 말과 중국 등 아시아 미술에서 볼 수 있는 말 등 다양한 유형의 말이 소재로 등장한다”며 “어떤 경우에는 ‘나 자신이 말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장 2층에서 만날 수 있는 ‘영웅(Hero)’ 연작은 평범한 일상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작업 여정이 여과 없이 드러난 그림들이다. ‘교차로의 마법사’(2023)에는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중심인 지구의 배꼽’이라고 믿는 옴팔로스가 등장한다. 그런데 옴팔로스는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탑을 한 손으로 든 채, 런던의 벽돌 담벼락을 넘어 미지의 공간으로 향한다. 지구가 떠 있는 하늘은 옴팔로스의 다른 한 손을 파랗게 물들인다. 그 너머에는 뒤틀린 시공간으로 연결된 것 같은 나선형 계단이 부유하듯 떠 있다.
작가는 “관람객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마치 마법 같은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화이트 와인과 잉크를 섞은 안료로 다채로운 층위에 걸쳐 번지도록 표현한 작가 특유의 드로잉도 눈길을 끈다.
한편 이번 전시는 2020~2023년 사이 제작된 보시치의 근작 회화 22점과 드로잉 46점으로 구성됐다. 전시를 위해 선화랑은 소더비 인스티튜트 학장을 지낸 이안 로버트슨 홍익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맥킨지와 소더비 출신의 미술 기획자 클레어 맥캐슬린-브란운 등 국내외 미술계 전문가들과 협업했다. 전시는 다음달 3일까지 열린다.
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