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폭력서 도망쳤다 불법신분 전락
위기 임산부 10명 중 4명은 ‘외국인’
국내 출생등록 못한 아동 최소 4000명
“부모 자격 관계 없이 등록권 보장해야”
“‘엔터테이닝 잡’이라고 설명했어요. 필리핀 펍에서 ‘밴드 싱어’ 일을 했으니까, 비슷한 일이겠거니....” 최근 서울 용산구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난 필리핀 출신의 미등록 외국인인 미혼모 소피(40·가명)씨가 힘겹게 이야기를 털어놨다.
필리핀에서 3명의 아이와 부모님을 부양하던 소피는 필리핀 현지 이주 에이전시의 브로커로부터 “한국에 가서 일을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구체적인 설명을 듣지는 못했다. 서비스업 등 단순 노무에 종사하는 외국인에 주는 E9(비전문취업) 비자를 받을 것이란 정보가 전부였다. 그러나 소피가 2018년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맞닥트린 현실은 ‘성매매’였다.
일을 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구조. 성매매업계에서 벌어지는 흔한 착취 공식이다. 소피는 “집, 옷, 밥을 주는데 다 빚으로 쌓여서 도저히 술만 팔아선 갚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사이 2020년 딸 레이첼이 태어났고, 소피는 사업장에서 도망쳤다. 그렇게 불법 신분 모녀가 됐다.
이후로는 여러 사업장을 전전하며 살았다. 광주의 한 공장에서 옷걸이를 만들기도 했고, 분당, 인천 등 수도권 가정 곳곳에서 가사도우미를 하기로 했다. 서울의 한 탁아소에서 일을 하는 현재의 월 수입은 150만원. 필리핀에는 한 달에 100만원씩 보내고 있다.
▶브로커 사기, 가정 폭력으로...미등록 전락하는 외국인 미혼모=지난해 ‘유령아동’ 문제가 불거지며 국내에 출생 등록을 하지 못한 최소 4000명의 외국인 유령 아동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원 조사로 드러났다. 다만 이마저 병원에서 출산한 경우를 전제로 한 최소치다. 국내 위기 임산부 10명 중 4명은 ‘외국인’이라는 민간 단체 조사 발표도 있지만 정부 차원의 별도 후속 대책은 여전히 없는 상황이다.
소피는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가 불법 신분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흔한 사례다. 현지의 가족 부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왔지만 수수료를 노린 브로커들의 사기로 미등록 상태에서 일을 이어가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몽골 출신의 30대 미등록 외국인 A씨는 한국에 일을 하러 오기 위해 현지에서 빚을 내 브로커 비용을 지불했다. 관광 비자로 입국, 이후 비자를 전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정작 한국에 오니 방법이 없었다. 이후 모텔 청소와 자수·재봉 공장 등을 전전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를 부양하는 여성의 경우 미등록이면서 미혼모라는 신분에 이중으로 갇히게 된다. 미등록 외국인을 지원하는 강다영 용산 나눔의집 활동가는 “사업 비자를 가진 배우자와 함께 들어왔다가 배우자가 가정을 떠나거나, 국내에서 결혼해 결혼 비자를 받았다가 가정 폭력에 시달려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면서 비자를 상실하는 사례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국내 위기 임산부, 10명 중 4명은 외국인”=한국위기임신출산지원센터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1개 위기 임산부 지원센터가 지원한 628명의 위기임산부 가운데 43%(272명)은 외국인이었다. 국내 위기 임산부 10명 중 4명은 외국인이라는 이야기다. 또 서울 서대문구 소재 미혼모자 생활시설 애란원에 따르면 이들이 지원한 외국인 임산부 50명 중 70%(35명)는 ‘외국인 근로자’였다.
그 사이 미등록 외국인들의 임신과 출산 문제는 민간 지원단체에 여전히 의존해 있다. “어제도 1명, 오늘도 1명이 찾아왔어요.”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미혼모 지원 시설 마음자리에는 한 달에 2명 꼴로 미등록 외국인 임산부들이 찾아온다.
문제 없이 출산만 한다면 10만원선에서 의료비 지원이 끝나지만, 아이에게 건강 문제라도 있자면 부담이 급격히 불어난다. 최근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아 대학병원으로 옮겨 검사까지 받는 과정에서 진료비가 1억원까지 불어났다.
이들 대부분은 일손이 부족한 지방의 농업에 필수 인력으로 투입돼 있다. 전남의 한 미혼모 지원 시설 관계자는 “전라도에 농업 산업이 크다 보니, 미등록 미혼모 대부분은 농장에서 일손을 돕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다른 시설 관계자 역시 “시골에서 농장 일을 도우는 일을 하다 출산을 하게 되면서, 지원받을 곳을 찾다 서울까지 올라와 한 달가량 짧게 머물고 다시 돌아가곤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체류 자격과 관계 없이, 우선 국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출생 등록할 권리를 보장하는 ‘보편적 출생등록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1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인 ‘외국인 아동의 출생등록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출생 등록 없이는 미등록 아동이 처할 수 있는 각종 학대, 인신매매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며 “일단 태어난 아동에 대한 기록은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혜원·박지영 기자
k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