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 소용없다” 5대 은행 정기예금, 한 달 새 13조원↓
“최고 3.5% 수준” 자금 이탈에도 예금금리는 계속 줄어
2달 만에 50조원 늘어난 요구불예금으로 필요 자금 충당
“요구불예금 증가세 계속…정기예금 금리 인상 요인 부족”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당장 밥값 오르는 게 눈에 보이는데, 연 3% 수익이 맘에 들 수가 없다”(시중은행 PB센터 관계자)
한때 5%를 돌파했던 은행권 정기예금 이자율이 3%까지 떨어지며, 주요 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이 ‘썰물 빠지듯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물가 상승률이 3%대를 유지하는 가운데, 예·적금을 통해서는 적정한 투자 수익을 거둘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하면서다.
통상 자금이탈은 은행권에 ‘악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은행들은 남몰래 웃음 짓는다. 중동 위기, 고환율 등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탈한 예금 규모를 뛰어넘는 ‘수십조원’ 규모의 대기성(저원가성) 자금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 수준’ 은행 정기예금 수요↓…“수익 체감 힘들어”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3월말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정기예금 잔액은 873조3761억원으로 전월(886조2501억원)과 비교해 12조8740억원(1.4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정기적금 잔액은 33조2205억원에서 31조3727억원으로 1조8478억원(5.56%)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지난 2월까지만 해도 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한 달 만에 23조6315억원이 증가한 바 있다. 하지만 3월 이후 은행권 예금금리가 기준금리(3.5%) 아래로 내려간 가운데, 주식·비트코인 드 여타 투자처의 수익률이 돋보이며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고 있다. 이날 기준 5대 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3.45~3.55%로 집계됐다.
은행 정기예금은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분류된다. 이에 높은 수익률을 보이지 않더라도 꾸준한 수요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여타 투자처 수익률이 떠오르는 데 이어, 물가상승률 또한 정기예금과 유사한 수준인 3%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기회비용 대비 실질수익률이 0% 수준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예금을 재예치하지 않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게 은행 측의 설명이다.
한 시중은행 PB센터 관계자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정기예금 수익률 3%대는 적은 수준이 아니지만, 가상자산 등 수익률이 돋보이는 데다 체감 물가 또한 눈에 띄게 오르고 있다”면서 “자금을 보관하는 용도로 볼 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각종 투자처에 투자 열기가 오르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쉽사리 추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투자처’ 못찾고 몰리는 공짜예금…은행권은 ‘비용 절감’
통상 지금과 같은 자금 이탈은 은행권에도 ‘위기’로 여겨진다. 정기예금 등을 통해 자금을 모으고, 이를 대출해주거나 운용해 수익을 거두는 게 주요 이익 창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권은 최근 발생하는 예금 이탈이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탈한 예금 규모 이상의 요구불예금이 흘러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요구불예금은 수시입출금이 자유로운 예금으로 무원가성 자금, 혹은 대기성 자금으로 불린다. 이자율이 거의 0%에 가까운 수준이기 때문에 자금 조달 비용이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여기에는 보통예금·급여통장, 파킹통장 등이 포함된다. 지난달말 기준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MMDA 포함) 잔액은 647조8882억원으로 전월보다 33조6226억원 증가했다. 이는 최근 17개월 만에 최고치다. 요구불예금 잔액은 전월에도 23조원 넘게 늘어나며 두 달 만에 50조원가량의 증가세를 기록했다.
이는 최근 들어 투자 관망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다. 지난해말 이후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늘어나며, 증시는 회복 국면에 진입했다. 기준금리 인상 이후 쌓여왔던 투자 수요는 살아났다. 하지만 곧 기준금리 인하 전망이 미뤄진 데 이어, 중동 위기 등 대외적 요인이 계속되며 금융시장 불안정성은 확대됐다. 투자 의지는 있지만, 불안정한 정세에 따라 투자처를 정하지 못한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이에 은행권은 되레 수익성 향상을 기대하고 있다. 은행 자산 중 요구불예금 비중이 높을수록, 수익성은 높아진다. 거의 이자비용을 지출하지 않고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근 은행권 자금조달 비용 기준으로 여겨지는 은행채 금리는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 은행들이 남몰래 웃음 짓는 이유다.
문제는 현상이 지속될 경우, 은행들이 정기예금 금리를 높일 요인이 줄어들 수 있다는 거다. 실제 최근 국제 정세 불안정 요인 중 하나인 중동 위기는 격화되고 있다. 아울러 증시 등에 호재로 작용하는 기준금리 인하 시기는 ‘차일피일’ 미뤄진다. 은행권 관계자는 “정기예금이 다소 줄긴 했지만 이전과 비교해 절대적인 규모가 큰 상황”이라며 “저원가성 예금인 요구불예금 비중이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경우, 정기예금 금리를 무리하게 조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