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여운이 가시기 전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tvN ‘택시’)에서 변요한은 영리하게도 “모든 미생에게 바친다”며 ‘말하는 대로’(처진 달팽이)를 불렀다. 고단한 청춘의 시간을 씩씩하게 버텨내는 유쾌한 한석율로 몰입하나 싶었는데, 어느샌가 변요한의 이야기가 들렸다. 나이에 맞지 않게 깊숙이 채워 둔 인내의 시간이 비쳤다.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힘들었던 20대”를 견뎌 “멈추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말하는 대로’ 중) 자기의 길을 가는 변요한의 시간이 짧은 노래에 스며들었다.

늦었다고도, 이르다고도 말할 수 있는 나이 서른이 되며 변요한의 삶이 조금 달라졌다. 충무로에선 ‘독립영화계의 송중기’로 불리는 유망주였다지만, TV시청자에겐 생짜 신인에 불과했던 그는 이 드라마로 모두가 팬이라고 자처하는 배우가 됐다.

“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힘든 것 같아요. ‘미생’까지 오는 길이 힘든 과정이었을 수도 있어요. 즐길 때도 많았죠. ‘말하는 대로’는 제겐 힐링곡이었어요. 처음 들었을 때 가사가 좋아 울컥하기도 했어요.”

‘미생’ 이전의 변요한은 짧은 시간 다양한 삶을 살았다. 목회자 아버지는 워낙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장남이 안쓰러워 당신의 친구에게 중학생 아들을 맡겼다.

“제겐 마음 속의 스승님이신데, 아버지가 아는 배우셨어요. 말더듬이를 극복하고 좀 더 담대해지는 변화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그 분을 통해 연극을 배우고,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제가 더듬지 않고 말을 하더라고요. 더듬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다는게 재밌었어요. 그 때부터였어요. 배우를 꿈꿨던 건요.”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꿈이 아들과 같진 않았다. ‘반항 아닌 반항’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며 쑥스러운 듯 웃는 변요한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얼빈에서 콧속까지 얼어불을 정도의 강추위, 그보다 더 컸던 외로움과 싸우며 변요한은 시간을 벌었다. 아버지에겐 “‘국제무역’을 전공하는 대학 진학이 목표”라고 했지만, 그보단 훗날 배우가 된다면 영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유학생활은 짧았다. 아버지가 건네준 ‘입대영장’을 받아들고 군대에 다녀온 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한예종이라는 학교가 있는데, 그곳에 입학한다면 배우의 길을 허락하겠다”는 아버지의 생각이 변요한의 지금을 이끌었다. “꿈을 존중하고, 꿈이 있는 걸 원하는 분이셨어요. 그 꿈이 정말 간절하고 계속 달릴 수 있을 만한 크기인가를 보셨던 것 같아요.”

“연극영화과는 어느 대학이나 치열하다. 운이 좋아 이 길에 접어들 수 있었다”는 변요한은 지금 4년째 휴학 중이다. 그 기간 ‘독립영화’를 통해 다양한 연기를 만나며 업계에 얼굴을 알렸다. ‘토요근무’(2011)가 시작이었다. 한 살 차이 여동생은 이미 앞서 연영과에 진학해 연기도 하고, 대본도 쓰는 선배가 됐다. 변요한에겐 “최고의 팬이자 안티”인 든든한 동료다. 오빠의 연기를 인정하지 않던 동생이 “박정구를 사랑할 것 같다”는 감격스러운 평가를 내놓은 ‘들개’는 김원석 감독의 눈에도 띄었다. 변요한이 ‘미생’의 막차에 올라타게 된 계기였다. 그게 불과 촬영 열흘 전이었다.

묵묵히 일만 하는 ‘다큐 같은 드라마’ 안의 한석율은 사실 조용하고 속 깊은 변요한과는 어울리지 않게 들뜬 캐릭터였다. 김원석 감독은 변요한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다이나믹할 것”, “리드미컬할 것”, “화술적으로 뛰어날 것”. 그래서 “어떤 자리의 사람에게나 자연스럽게 섞이고 어울릴 수 있는 인물”이 될 것. 때로는 ‘조증’이 극대화된 ‘오지랖 대마왕’ 한석율이었기에, 카메라 밖에서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변요한의 모습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대본을 받아보는 순간 한석율의 대사들이 시끄럽다고 느껴졌어요. 입에 잘 붙지 않아 리딩도 못 하겠더라고요. 모든 배우가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선 말도 더듬기 시작했죠.”

그런 변요한의 내면을 알아차린 김원석 감독은 두 번째 만남에서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 손의 온도가 참 따뜻했다”고 변요한은 김 감독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모든 배우가 그렇듯 “자기 안의 하나의 모습을 꺼내 증폭시키거나 축소시키는 에너지의 차이가 연기인 것 같다”는 변요한은 자신의 양면적인 모습을 꺼내 ‘미생’에서 성실히 풀어냈다. 그래도 후회는 남는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면 조금 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 것처럼, 연기도 마찬가지”라며 “좀 더 이해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

“달라진 변화를 인식하고 싶진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싶죠. 지금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어요. 하나 목표가 있다면 꼭 필요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 전에 자연인 변요한의 내면을 채워야겠죠. 연기보다 사람이 먼저잖아요.”

내내 차분했던 변요한은 마주 앉은 자리에서 딱 한 번 당찬 ‘한석율’ 티를 냈다.“언젠간 동생과 함께 한 작품에서 작업하는게 꿈이예요. 대한민국 영화계에 류승완-류승범 형제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