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은 억울하다? 주거 마련 문턱을 낮추기 위해 출시된 50년 만기 주담대가 ‘누더기’ 주담대로 전락하고 있다. 가계부채 확대를 조장한다는 논란에 은행들이 잇따라 나이 제한 및 판매 중단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금융당국 역시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강화를 검토하고 나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의 조급한 정책이 화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세계적인 집값 상승으로 해외 여러 국가들이 초장기 주담대 정책을 확대하고 있는 흐름에도 역행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가계 대출 확대에 볼모 잡혀 ‘주거사다리’가 훼손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근본적인 가계부채 부실 방지를 위해서는 고정금리 확대 등 대출구조를 바꾸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출시 두 달여 만에 ‘누더기’된 50년 만기 주담대
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국내 주담대 잔액은 1031조2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분기 주담대 증가폭(14조1000억원)은 전 분기와 비교해 3배가량 늘어나며, 가계 빚 상승을 견인했다. 가계부채 확대를 의식한 금융당국은 이달에만 2조원 넘게 불어난 50년 만기 주담대를 주요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관리에 나섰다. 이들은 DSR 우회 등 부작용을 방지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곧 내놓겠다는 입장이다.
은행들 또한 금융당국의 입장에 맞춰 50년 만기 주담대에 대한 대출제한을 강화하고 있다. NH농협은행, 경남은행 등은 이미 상품 판매 중단을 결정했으며, 카카오뱅크는 만 34세 이하로 가입연령을 자체 제한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은 초장기 주담대가 DSR 우회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지적에 따라, DSR 강화 여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출제한으로 제도의 취지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조급한 규제 정책으로 애초 추진했던 초장기 만기 주담대의 목적인 상환부담 감소 및 주거사다리 효과가 미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부 은행들에서 도입한 만 34세 나이 제한이 일반화되면, 4050 중장년층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내 주담대 평균 보유기간이 7년 정도인 데다, 아파트 등의 경우 담보 회수 리스크도 매우 적은 상황에서 50년 만기 대출에만 획일적 규제를 적용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라며 “결국 은행들이 우선적으로 리스크 관리를 하며, 혜택이 필요하되 상환능력이 있는 고객들에 상품을 제공하는 건데, 과한 조치로 싹을 자르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해외서도 ‘초장기 만기’ 확대 중…‘50년 만기’ 등 특정 상품 규제는 적어
초장기 주담대 도입은 최근 세계적 추세 중 하나다. 주택 구입 부담이 커진 데 따라, ‘내 집 마련’ 문턱을 낮추려는 각국 정부의 움직임이 다수 포착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1~5년 만기 대출의 비중이 높았던 영국의 경우 지난해 50년 만기 주담대를 도입하는 등 꾸준히 초장기 주담대 비중을 높이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영국의 40년 만기 모기지 비중이 전체의 57%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밖에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과 일본에서는 50~60년 만기 대출을 취급하고 있으며, 스웨덴의 경우 100년이 넘는 만기의 주담대를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50년 만기 등 특정 상품에 대해서만 대출규제를 가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경우 현재 주담대에 대해 대출 만기와 은퇴연령을 고려해 주택담보인정비율(LTV)를 차등 적용하는 방안을 시행 중이다. 최대 50년 만기 주담대를 제공하는 일본은 신청자의 연령에 따라 유연한 만기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금융사마다 별도로 기대수명, 은퇴연령 등을 고려한 대출 제도를 운용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계부채 부실 줄이려면 ‘고정금리’ 비중 늘려야
일각에서는 애초 가계대출 부실 문제를 줄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주담대 규제가 아닌, 대출 구조를 우선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핀셋 규제로 인한 부작용을 감당하기 보다, 중장기적 시스템 개선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국내 주담대는 변동금리 비중이 높을 뿐만 아니라, 고정형 주담대 또한 5년 고정 후 변동금리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이자 부담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가계대출의 부실 우려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초장기 모기지 중 고정금리 비중이 높다. 글로벌 통계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초장기 모기지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영국의 경우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취급된 주담대 중 변동금리 비중이 5% 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장기 고정금리 주담대가 활성화된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금융위원회 보도자료에 따르면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은 고정금리 대출 비중이 각각 85%, 97.4%, 90.3% 등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순수고정금리 비중이 25.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이 또한 정책금융 상품이 대부분이다.
이는 고정금리를 가능케 하는 장기 주택저당증권(MBS) 발행을 주택금융공사에서 주로 하고 있으며, 민간 발행이 활성화돼 있지 않은 영향이 크다. 시중은행들이 장기 고정금리를 운용할 수 있는 자금시장 발판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당장 2조원 정도 50년 만기 대출이 늘어났다고 해서, 규제를 덧대는 것은 주거 마련 기회를 줄일뿐더러, 부동산 시장에 의한 경기 부양을 침체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현재 주담대 자체의 연체율 등 부실 위험도 크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리스크 관리를 은행에 맡기고 당국은 장기적인 구조 변화에 힘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