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수 참전유공자회 경기도지부장 인터뷰
“미국 참전으로 북한 주춤…동맹 강화해야”
[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불과 며칠 내로 부산까지 점령당했을 거에요. 미군 참전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김홍수(92·예비역 육군 대령)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경기도지부장은 경기 수원 사무실에서 헤럴드경제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김 지부장은 6·25전쟁이 발발한 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얘기를 듣고 제주농업중학교 5학년 재학중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1950년 7월 제주도를 떠나 욕지도에서 일주일가량 제식훈련을 비롯한 기초적인 훈련만 받은 뒤 곧바로 부산을 거쳐 안강지구전투에 투입됐다.
“그때 과수원에 있었는데 가자마자 막 여기저기 폭탄이 떨어지는데 준비는 안 돼 있어서 나무 밑에 숨고 그랬죠”
김 지부장은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부터는 강원도 산악지대로 도망친 인민군 소탕작전에 나섰다.
소대 선임하사였던 그는 갑종장교 7기 후보생으로 지원해 1951년 12월 8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쟁은 70여년 전 일이지만 여전히 참혹한 기억이다.
“3사단 23연대 1대대 박격포소대 관측장교로 있을 때였어요. 기관총 2소대의 임 소위가 저보다 선배였는데 우리 박격포 포탄이 명중하니깐 기분이 좋아서 관측소에 있다가 입구로 나가 ‘명중! 명중!’ 고함을 쳤어요”
채 1분도 지나기도 전 ‘쿵’ 소리와 함께 김 지부장이 있던 관측소 지붕이 흔들리고 흙먼지가 뿌옇게 차올랐다.
다행히 관측소는 무너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뒤 흙먼지를 털고 일어선 김 지부장은 곧바로 임 소위를 찾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관측소에서 나가 보니 적이 임 소위를 직사포로 조준해 명중시켜버리는 바람에 완전히 공중분해 돼버렸어요. 임 소위가 서있던 자리는 피투성이였고, 병력을 동원해 시신이라도 수습하려 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어요. 50m 전방 교통로에서 겨우 왼쪽 팔 일부만 발견해 후송했습니다. 관측소를 왔다 갔다 하는데 전우의 시신을 밟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괴로웠어요”
김 지부장은 6·25전쟁 당시 미국과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이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지만 이게 북한에 큰 경고가 돼 결국 주춤하게 만들었어요. 북한군 공격이 며칠 동안 주춤한 바람에 우리가 시간 여유를 벌 수 있었고 나중에 낙동강 방어선 사수와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해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었던 거죠”
그는 앞으로도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기 때문에 안보가 보장돼 한국이 경제나 모든 분야에서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25전쟁을 통해 미군과 피로 맺은 전우가 된 노병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옛 전우에 대한 그리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전쟁 때 바로 옆 호에 있던 미군 중위가 자기들 씨레이션(전투식량)을 가지고 와서는 한국 밥을 좋아한다며 자주 나눠 먹곤 했어요. 귀국명령을 받고 돌아가면서 둘이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전쟁 때인데도 사단사령부와 연대, 대대, 중대를 거쳐 결국 나한테 돌아온 일도 있어요. 고향이 하와이라고 그랬는데, 지금 살아있으면 좀 연락하고 싶은데 주소를 알 수 있어야지”
김 지부장은 6·25전쟁과 베트남전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화랑무공 훈장과 보국훈장 삼일장, 그리고 미 육군 표창 등을 받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국민들의 굳건한 안보의식과 단합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6·25전쟁 때 우리 국민 모두가 꼭 승리해야 한다, 절대로 북한 공산군에게 뺏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남베트남 사람들은 조금 안일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국민들이 일치단결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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