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양대근 기자] 유럽연합(EU)이 중국에 대한 원자재 의존을 줄이기 위한 핵심원자재법(CRMA)과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항할 탄소중립산업법(NZIA·Net-Zero Industry Act) 초안을 지난 16일(현지시간) 발표했다.
EU는 세계 무역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 시장이다. ‘유럽판 IRA’ 적용을 기점으로 EU의 영향력이 큰 원자재와 재생에너지 시장이 급변할 것으로 관측된다. 외부 상황 변화에 따라 한국 정부와 기업들 역시 대응책 찾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으로 분석된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이번에 발표된 두 법안의 초안은 중국에 대한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고 역내 보호장벽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다만 미국의 IRA나 반도체지원법(칩스법)과 달리 한국을 비롯한 역외 기업에 대한 차별적 조항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핵심원자재법은 오는 2030년까지 EU의 전략적 원자재 소비량의 65% 이상을 특정한 제3국에서 수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이 핵심으로 꼽힌다. 구리·니켈·리튬·실리콘·티타늄·희토류와 관련해서 중국 등 특정 국가에 대한 핵심 광물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안이다. 현재 EU는 희토류·갈륨·마그네슘의 90% 이상을 중국에서 들여오고 있다.
탄소중립산업법은 2030년까지 EU가 태양광·풍력·배터리·열펌프·전기분해 및 연료 전지·바이오가스 또는 탄소 포획 등을 위한 장비 수요의 40%를 역내에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담았다. 현재 수년여가 걸리는 이들 관련 사업에 대한 인허가를 18개월 이내로 해주도록 한다. 아울러 2030년까지 연간 이산화탄소 저장 용량을 5000만t으로 늘리고 역내 석유 및 가스 생산자가 이 목표에 기여하도록 요구할 방침이다.
경제계와 증권가에서는 EU의 이번 조치가 단기적으로 한국 재생에너지 기업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지만 전략적인 대응책을 계속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유럽 태양광발전산업협회인 솔라파워유럽에 따르면 지난해 EU 국가의 전체 태양광 시장 규모는 208.9GW(기가와트)로, 올해는 전년 대비 21.5% 급성장한 247.5GW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미국의 태양광 시장 예상 규모는 170GW로, 전년 대비 21% 성장이 추산되는 것을 감안하면 유럽 시장은 이와 비슷하거나 한층 더 가파른 성장세가 기대된다.
하지만 유럽 내 태양광 설치 수요와 대조적으로 역내 생산능력은 굉장히 낮다. 전세계 태양광 밸류체인 공급망의 90% 이상을 중국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해 유럽 내 태양광 신규 설치량은 41.4GW(기가와트)인 반면, EU 역내의 태양광 모듈 생산능력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9.2GW에 불과하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는 자국 태양광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독일 태양광 산업 내 절대적인 중국 의존의 결과에 대해 우려가 증가하고 있는데, 태양광 산업의 중국 의존도는 가스의 러시아 의존도보다도 훨씬 더 큰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EU의 이번 조치를 통해 한화솔루션을 비롯해 한국 기업에게 기회가 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는 보고서를 통해 “독일의 역내 태양광 생산 확충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에 앞서 우리 기업도 새로 부상하는 독일 및 유럽 태양광 시장 내 소재, 부품 및 장비 시장을 타깃으로 한 시장 공략의 채비를 갖출 필요가 있다”면서 “고부가가치 소재 및 부품을 위시해 태양전지 핵심 장비 수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연승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태양광 기업들 중 유럽 내 생산설비를 현재 보유하고 있거나 당장 증설을 계획 중인 기업은 없기 때문에 태양광 기업들이 받을 직접적인 보조금 수혜는 없을 전망”이라면서 “다만 태양광을 비롯해 재생에너지 산업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환경이 갖춰지는 점은 중장기적 수요 확대 및 발전사업, EPC 등 사업 기회가 넓어진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유럽 풍력 시장에서는 현재 국내 기업인 씨에스윈드가 포르투갈에 생산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EU는 역내에 위치한 포르투갈 법인을 통해서 육·해상풍력용 타워를 공급할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정 연구원은 “씨에스윈드가 포르투갈 내 생산 능력 확장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정책을 통해서 증설 과정에서 보조금 지원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산업통상자원부는 두 법안을 상세하게 분석해 업계에 미칠 위기 및 기회 요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조만간 관련 기업들과 간담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아울러 업종별 영향과 세계무역기구( WTO) 규범 위반 여부 등을 상세히 분석하고 구체적인 대응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