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케이크 하나 주세요.” “담을 그릇은요? 그릇 없으면 안 팝니다.”
얼핏 보면 마치 ‘신종 갑질’ 같기도 하다. 하지만 주인과 손님의 대화라면? 그것도 주인이 먼저 안 팔겠다고 하는 대화라면?
이유가 있다.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서다. 일회용기 사용을 줄이자는 ‘용기내 챌린지’가 유행이다. 물건을 살 때 일회용품 없이 텀블러나 냄비, 밀폐용기 등으로 포장하는 환경보호 실천 운동.
하지만 이름처럼 용기(容器)뿐 아니라 용기(勇氣)도 필요하다. 담을 그릇을 내밀었다가 가게 주인한테 면박을 받거나 거절 당하기 일쑤다. 업주 입장에선 차라리 일회용품 포장이 편하기 때문이다.
사실 더 용기가 필요한 건 소비자가 아닌 가게 주인이다. 일회용 포장 없이 팔고 싶어도 당장 고객들 불만이 상당하다. 매출만 보면 당연히 손해다.
그래서 고객이 그릇을 가져오지 않으면 케이크 포장 판매를 하지 않겠다는 이 가게, 대단한 용기다.
길현희 대표는 서울 종로구와 마포구에서 카페 ‘얼스어스(earth us)’를 운영하고 있다. 케이크로 입소문이 자자한 카페다.
여기서 케이크를 포장하려면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예약은 필수, 꽤 긴 주문서도 미리 작성해야 한다. 조건도 구체적이다. 작은 케이크는 가로·세로 10㎝·높이 11㎝, 큰 케이크는 가로·세로 16㎝· 높이 11㎝ 이상의 용기를 지참해야 한다.
종이나 합성수지로 된 일회용기도 불가하다. 가게에서 허용하는 다회용기는 밀폐용기나 냄비 정도. 마땅한 그릇이 없다면 도마나 볼에 담아가도 된다.
이처럼 까다로운 포장법이 왜 생겼을까. 시작은 사실 고객 때문이었다. 길 대표는 원래 포장 판매를 하지 않았다. 쓰레기를 만들기 싫어 매장에서도 일회용컵, 포크, 냅킨 등도 일절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가게가 유명해지면서 포장 요청이 늘었다. 이에 길 대표가 생각해 낸 결과물이다. 다회용기에 한해서만 포장 판매를 하는 것.
2017년에 문을 연 카페가 올해로 벌써 7년차다. 그 사이 소비자 인식도 빠르게 바뀌었다는 게 길 대표의 생각이다. 2018년 ‘쓰레기 대란’ 등 일회용품 쓰레기 문제가 부각되면서 다회용기 포장도 한결 익숙해졌다.
길 대표는 “다회용기 포장만 한다고 차갑게 평가받을 땐 의욕도 떨어졌다. 고소를 하겠다는 협박이나 일회용기를 가져와 포장해달라는 막무가내도 있었다”고 전했다.
또 “소비자에게 불편함을 주면서 시작한다는 게 서비스업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라며 “특히 카페 특성상 여름철에는 매출 30~40%까지 차지하는 일회용기 포장을 포기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끈기 있게 다회용기 포장 판매를 이어간 끝에, 이젠 실제 포장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통상 10개 안팎으로 들어오던 연말 케이크 예약이 작년엔 500개를 넘겼다. 케이크 박스, 일회용 칼 등을 500여개 일회용 쓰레기를 실제 줄인 셈.
이제 일회용품은 제도 상으로도 점차 사라질 예정이다. 작년 11월 24일부터 환경부는 매장 내에서 컵, 빨대 등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했다. 계도 기간이 끝나는 올해 11월 말부턴 최소한 매장 내에선 일회용품은 사라진다.
배달과 포장에서도 다회용기 사용이 더디지만 늘어가고 있다. 서울시는 작년부터 4개 배달 플랫폼과 함께 강남·관악·광진·서초·서대문 등 일부 구에서 다회용기 배달 시범 사업을 하고 있다. 작년 말 기준 서울 시 내 490개 매장이 참여했고, 하루 평균 배달 175건이 다회용기로 주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