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하이오(Ohio)주, 클리브랜드(Cleveland)
19세기 산업혁명 초기부터 토머스 에디슨의 전기 발명,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 석유왕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창업 등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서서히 산업경쟁력을 잃으며 쇠락해 소위 중서부 ‘러스트벨트(rust-belt)’의 대명사로 오바마 대통령 때는 민주당, 트럼프 대통령 때는 공화당으로 돌아선 미국 정치·경제의 부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 2022년 10월 백악관의 핵심 경제참모인 브라이언 디스(Brian Deese) 국가경제회의(National Economic Council) 의장이 이곳 클리블랜드에 온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역경제인들을 만나 바이든 행정부가 역점 추진 중인 ‘현대적 미국 산업전략(Modern American Industrial Strategy)’을 발표하며 오하이오주와 같은 러스트벨트를 최첨단 혁신 제조업 중심지로 변모시켜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미국판 신(新)산업정책의 진화
바이든 행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미국의 공급망, 산업경쟁력, 기술패권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취임 100일 내 첫 프로젝트로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핵심 광물 등에 대한 공급망 분석을 진행하는 한편 구글의 CEO였던 에릭 슈미트를 의장으로 ‘인공지능(AI) 국가안보위원회’를 구성해 도합 10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두 개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핵심 메시지는 그간 과도한 글로벌화, 아웃소싱으로 미국내 주요 산업 기반과 공급망이 붕괴돼 국가안보를 위협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위기의식이다. 또한 ‘중국 제조 2025’의 전방위적 산업정책으로 AI, 5G 등 중국의 핵심 기술이 미국을 압도할 정도가 됐다는 충격적인 경고였다. 지금 이때를 놓치면 영영 미국의 산업경쟁력 회복이 어렵고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므로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과 과감한 연구·개발(R&D), 인프라 투자가 시급하다는 메시지다. 또한 수출 통제, 투자 스크리닝 등을 통해 중국의 기술굴기를 막는 경제안보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취임 100일 내 발표된 두 보고서로 그간 서서히 진화돼온 미국판 신(新)산업정책의 근간이 마련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추진동력이 더 가속화된 셈이다.
아폴로 프로젝트를 뛰어넘는 미국판 신산업정책
아폴로는 미국인의 가슴을 뛰게 한다. 냉전 시대 소련이 쏘아 올린 ‘스푸트니크’위성에 충격받은 미국인들은 젊고 야심 찬 케네디 대통령의 “10년 내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담대한 상상과 비전에 매료된다. 10년이 지나기 전에 오하이오주 출신 루이 암스트롱은 아폴로를 타고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으며 미국인들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아폴로를 뛰어넘는 산업정책을 지향하며 반도체, 인공지능, 전기차 등 최첨단 산업의 미국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난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바이든 행정부가 미 의회에서 통과시킨 역사적인 4개의 법, 즉 ‘미국구제계획(the American Rescue Plan)’ ‘인프라법안(the Bipartisan Infrastructure Law)’ ‘반도체과학법안(the CHIPS and Science Act)’ ‘인플레이션 감축법안(the Inflation Reduction Act)’ 등에는 이러한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한 미국판 신산업정책의 주요 전략과 정책이 담겨 있다.
손 안의 휴대전화부터 F-35A 최첨단 스텔스전투기에 필수적인 반도체의 경우 미국에서 발명된 혁신 기술이었으나 월스트리트와 글로벌 기업들에만 맡겨둔 결과, 대부분 대만, 한국 등 아시아로 아웃소싱되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비율이 1990년 37%에서 현재 12%로 축소됐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시장 실패’인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미시간주의 SK 실트론공장을 방문해 반도체가 미 제조업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특히 디지털, 탄소중립 등의 새로운 패라다임을 형성하는 기초 기반기술과 인프라는 개별 기업과 시장 차원에서는 육성이 어려우므로 정부가 촉진자로 나서서 교통 인프라 구축, 초격차 기술 혁신 지원, 클린에너지 부문에 적극 투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분야별 비전과 지원 규모는 가히 획기적이다. 이를 위해 정부 및 민간부문에서 향후 10년간 약 3조5000억달러(4358조원가량)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쏟아부을 계획인데 이는 세계 경제 규모 4위인 독일의 GDP에 맞먹는 규모다. 아폴로를 뛰어넘는 규모로 혁신 기술에 투자하겠다는 비전이다.
신자유주의의 퇴조 : “ 세계는 더는 평평하지 않다”
이러한 미국의 신산업정책 기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글로벌 경제를 이끌어온 정치·경제 패라다임의 대전환이 아닐 수 없다. B.C(Before Corona)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A.C(After Corona)의 새로운 시대사조의 등장이라 할까.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 창설 및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가속화해온 미국 주도 ‘워싱턴 컨센서스’의 핵심은 글로벌화, 시장경제, 정부 개입 최소화, 규제 완화, 자유무역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철학이었다. ‘세계는 평평하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이 곳곳에 넘쳐 났다.
하지만 2016년 트럼프의 등장은 ‘세계가 그리 평평하지는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 지난 40여년간 글로벌화의 그늘 속에서 서서히 진행돼왔던 미 제조업의 쇠락 및 중산층의 상실감, 부익부 빈익빈 등이 급기야 정치적 지각변동을 가져온 것이었다. 민주당 이너서클은 이 예상치 않은 패배와 정체성 위기하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철학의 오류, 정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미국판 신산업정책을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이다.
2020년 미 대선을 훨씬 앞두고 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은 기고를 통해 민주당 집권 시 올 큰 변화의 서곡을 알린다. 신자유주의에 종언을 고하며, 미국식 산업정책의 뿌리를 미국 최초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에서 찾는다. 미국 건국 당시 해밀턴이 제조업 육성을 위한 강력한 산업정책을 옹호했던 것처럼 산업정책은 미국의 전통이며, 그 건국 초기 ‘산업정책’의 전통을 되찾을 때라고 강변한다. 이렇게 산업정책은 미 경제안보정책의 주류로 자리 잡아 2022년 10월 발표된 백악관의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산업정책의 중요성을 명시적으로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IRA의 평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산업정책의 새로운 르네상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이러한 미국판 신산업정책의 파고를 처음 실감할 수 있는 사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하원이 여야로 쪼개진 새로운 미 의회에서 법 개정을 통한 근본적 해결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유럽연합(EU)은 미국으로의 산업기반 상실 우려에 미국과 비슷한 EU 버전의 산업 정책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Buy American(바이 아메리칸)’과 유사한 ‘Buy European(바이 유러피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을 방문했던 필자는 워싱턴 분위기가 미국 내 정치·경제·지정학적 의미가 있는 법(IRA) 개정을 기대하기보다는 EU나 타국도 미국과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미국과 EU가 자유무역과 국제통상질서 유지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리드했던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각자 자국 국익에 우선한 산업 정책의 경쟁적 도입 등 각자도생의 전국시대로 진입한 듯하다.
중요한 것은 IRA 같은 사례가 일회성이 아니라 향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세계는 미-중 기술패권, 팬데믹, 기후변화 등 지정학적·구조적 동인으로 거대한 판이 새롭게 짜여지는 상황이다. 특히 이런 핵심 산업과 기초 기반기술 특성상 향후 국가경쟁력과 국가안보까지 밀접하게 관계돼 있어 과거와 달리 산업 정책, 민·관 파트너십이 중추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IRA의 국제통상규범 위반 가능성에 목소리를 높일 때 미 의회는 IRA 통과 직후 경쟁하듯 수십억달러대 대미 투자를 발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보며 IRA의 성과에 자축하는 분위기였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상규범 및 자유무역 체제 원칙은 불변의 가치이나 향후 다가올 통상 마찰 이슈는 더 적극적 산업정책과 근본적인 산업·기술경쟁력 강화로 대응해야 할 시대가 대서양발 편서풍을 통해 오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Ohio)주, 클리브랜드(Cleveland)
19세기 산업혁명 초기부터 토머스 에디슨의 전기 발명,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 석유왕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창업 등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서서히 산업경쟁력을 잃으며 쇠락해 소위 중서부 ‘러스트벨트(rust-belt)’의 대명사로 오바마 대통령 때는 민주당, 트럼프 대통령 때는 공화당으로 돌아선 미국 정치·경제의 부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 2022년 10월 백악관의 핵심 경제참모인 브라이언 디스(Brian Deese) 국가경제회의(National Economic Council) 의장이 이곳 클리블랜드에 온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지역경제인들을 만나 바이든 행정부가 역점 추진 중인 ‘현대적 미국 산업전략(Modern American Industrial Strategy)’을 발표하며 오하이오주와 같은 러스트벨트를 최첨단 혁신 제조업 중심지로 변모시켜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미국판 신(新)산업정책의 진화
바이든 행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미국의 공급망, 산업경쟁력, 기술패권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취임 100일 내 첫 프로젝트로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핵심 광물 등에 대한 공급망 분석을 진행하는 한편 구글의 CEO였던 에릭 슈미트를 의장으로 ‘인공지능(AI) 국가안보위원회’를 구성해 도합 10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두 개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핵심 메시지는 그간 과도한 글로벌화, 아웃소싱으로 미국내 주요 산업 기반과 공급망이 붕괴돼 국가안보를 위협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위기의식이다. 또한 ‘중국 제조 2025’의 전방위적 산업정책으로 AI, 5G 등 중국의 핵심 기술이 미국을 압도할 정도가 됐다는 충격적인 경고였다. 지금 이때를 놓치면 영영 미국의 산업경쟁력 회복이 어렵고 국가안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므로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과 과감한 연구·개발(R&D), 인프라 투자가 시급하다는 메시지다. 또한 수출 통제, 투자 스크리닝 등을 통해 중국의 기술굴기를 막는 경제안보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취임 100일 내 발표된 두 보고서로 그간 서서히 진화돼온 미국판 신(新)산업정책의 근간이 마련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추진동력이 더 가속화된 셈이다.
아폴로 프로젝트를 뛰어넘는 미국판 신산업정책
아폴로는 미국인의 가슴을 뛰게 한다. 냉전 시대 소련이 쏘아 올린 ‘스푸트니크’위성에 충격받은 미국인들은 젊고 야심 찬 케네디 대통령의 “10년 내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담대한 상상과 비전에 매료된다. 10년이 지나기 전에 오하이오주 출신 루이 암스트롱은 아폴로를 타고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으며 미국인들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아폴로를 뛰어넘는 산업정책을 지향하며 반도체, 인공지능, 전기차 등 최첨단 산업의 미국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난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바이든 행정부가 미 의회에서 통과시킨 역사적인 4개의 법, 즉 ‘미국구제계획(the American Rescue Plan)’ ‘인프라법안(the Bipartisan Infrastructure Law)’ ‘반도체과학법안(the CHIPS and Science Act)’ ‘인플레이션 감축법안(the Inflation Reduction Act)’ 등에는 이러한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한 미국판 신산업정책의 주요 전략과 정책이 담겨 있다.
손 안의 휴대전화부터 F-35A 최첨단 스텔스전투기에 필수적인 반도체의 경우 미국에서 발명된 혁신 기술이었으나 월스트리트와 글로벌 기업들에만 맡겨둔 결과, 대부분 대만, 한국 등 아시아로 아웃소싱되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비율이 1990년 37%에서 현재 12%로 축소됐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시장 실패’인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미시간주의 SK 실트론공장을 방문해 반도체가 미 제조업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특히 디지털, 탄소중립 등의 새로운 패라다임을 형성하는 기초 기반기술과 인프라는 개별 기업과 시장 차원에서는 육성이 어려우므로 정부가 촉진자로 나서서 교통 인프라 구축, 초격차 기술 혁신 지원, 클린에너지 부문에 적극 투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분야별 비전과 지원 규모는 가히 획기적이다. 이를 위해 정부 및 민간부문에서 향후 10년간 약 3조5000억달러(4358조원가량)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쏟아부을 계획인데 이는 세계 경제 규모 4위인 독일의 GDP에 맞먹는 규모다. 아폴로를 뛰어넘는 규모로 혁신 기술에 투자하겠다는 비전이다.
신자유주의의 퇴조 : “ 세계는 더는 평평하지 않다”
이러한 미국의 신산업정책 기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글로벌 경제를 이끌어온 정치·경제 패라다임의 대전환이 아닐 수 없다. B.C(Before Corona)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A.C(After Corona)의 새로운 시대사조의 등장이라 할까.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 창설 및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가속화해온 미국 주도 ‘워싱턴 컨센서스’의 핵심은 글로벌화, 시장경제, 정부 개입 최소화, 규제 완화, 자유무역 등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철학이었다. ‘세계는 평평하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이 곳곳에 넘쳐 났다.
하지만 2016년 트럼프의 등장은 ‘세계가 그리 평평하지는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 지난 40여년간 글로벌화의 그늘 속에서 서서히 진행돼왔던 미 제조업의 쇠락 및 중산층의 상실감, 부익부 빈익빈 등이 급기야 정치적 지각변동을 가져온 것이었다. 민주당 이너서클은 이 예상치 않은 패배와 정체성 위기하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철학의 오류, 정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미국판 신산업정책을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이다.
2020년 미 대선을 훨씬 앞두고 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은 기고를 통해 민주당 집권 시 올 큰 변화의 서곡을 알린다. 신자유주의에 종언을 고하며, 미국식 산업정책의 뿌리를 미국 최초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에서 찾는다. 미국 건국 당시 해밀턴이 제조업 육성을 위한 강력한 산업정책을 옹호했던 것처럼 산업정책은 미국의 전통이며, 그 건국 초기 ‘산업정책’의 전통을 되찾을 때라고 강변한다. 이렇게 산업정책은 미 경제안보정책의 주류로 자리 잡아 2022년 10월 발표된 백악관의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산업정책의 중요성을 명시적으로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IRA의 평가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산업정책의 새로운 르네상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이러한 미국판 신산업정책의 파고를 처음 실감할 수 있는 사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하원이 여야로 쪼개진 새로운 미 의회에서 법 개정을 통한 근본적 해결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유럽연합(EU)은 미국으로의 산업기반 상실 우려에 미국과 비슷한 EU 버전의 산업 정책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Buy American(바이 아메리칸)’과 유사한 ‘Buy European(바이 유러피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을 방문했던 필자는 워싱턴 분위기가 미국 내 정치·경제·지정학적 의미가 있는 법(IRA) 개정을 기대하기보다는 EU나 타국도 미국과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미국과 EU가 자유무역과 국제통상질서 유지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리드했던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각자 자국 국익에 우선한 산업 정책의 경쟁적 도입 등 각자도생의 전국시대로 진입한 듯하다.
중요한 것은 IRA 같은 사례가 일회성이 아니라 향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세계는 미-중 기술패권, 팬데믹, 기후변화 등 지정학적·구조적 동인으로 거대한 판이 새롭게 짜여지는 상황이다. 특히 이런 핵심 산업과 기초 기반기술 특성상 향후 국가경쟁력과 국가안보까지 밀접하게 관계돼 있어 과거와 달리 산업 정책, 민·관 파트너십이 중추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IRA의 국제통상규범 위반 가능성에 목소리를 높일 때 미 의회는 IRA 통과 직후 경쟁하듯 수십억달러대 대미 투자를 발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보며 IRA의 성과에 자축하는 분위기였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상규범 및 자유무역 체제 원칙은 불변의 가치이나 향후 다가올 통상 마찰 이슈는 더 적극적 산업정책과 근본적인 산업·기술경쟁력 강화로 대응해야 할 시대가 대서양발 편서풍을 통해 오고 있다.
여한구 미국 아시아소사이어티(APSI·ASIA SOCIETY) 특별위원
bonsang@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