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상수·김현일 기자]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10일(현지시간) LG에너지솔루션(전 LG화학 배터리 사업부문)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에서 LG 측의 손을 들어줬다.
ITC는 이날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신청한 영업비밀 침해 사건에서 LG측 주장을 인정하는 최종 심결(determination)을 내렸다.
ITC는 SK 측에 대해 리튬이온배터리의 수입을 10년간 금지하는 제한적인 배제 명령을 내렸다.
다만, ITC는 SK의 공급업체인 포드, 폭스바겐의 미국 내 생산을 위한 배터리와 부품 수입은 허용하는 유예 조치도 함께 내렸다. 포드 전기차 생산용 배터리와 부품을 4년간 수입하도록 허용하고, 폭스바겐 전기차 라인에 대한 부품 공급을 위해 2년간 수입을 허용했다.
LG “상응하는 협의안 제시하라” …SK “비밀침해 못 밝혀 유감”
이날 ITC 판결에 대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LG는 SK의 영업비밀 침해가 명백히 확인됐다고 강조하며 SK가 이에 상응하는 합의안을 제시하라고 압박했다. 반면 SK는 이번 ITC 결정으로도 영업비밀 침해 사실이 실질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기대를 나타냈다.
LG는 11일 입장문에서 "이번 결정으로 SK이노베이션이 자사의 영업비밀을 탈취해 연구개발, 생산, 시험, 수주, 마케팅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부정하게 사용해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는 점이 명백히 입증됐다"고 강조했다.
SK를 향해서는 "이제라도 소송 상황을 왜곡해온 행위를 멈추고 ITC 최종 결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이에 부합하는 제안을 하라"며 "하루 빨리 소송을 마무리하는 데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영업비밀 침해에 상응하고 주주와 투자자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ITC 최종 승리 결과를 토대로 국내외에서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 단호하게 임할 수밖에 없다"며 "이번 최종 결정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소송을 계속 소모전으로 끌고 가는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SK에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SK는 입장문에서 "ITC가 쟁점인 영업비밀 침해 사실을 실질적으로 밝히지 못해 아쉽다"며 "다만 ITC가 포드, 폭스바겐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도록 유예 기간을 둔 것은 다행"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내 배터리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앞으로 남은 절차(Presidential Review 등)를 통해 안전성 높은 품질의 SK배터리와 미국 조지아 공장이 미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중인 친환경 자동차 산업에 필수적이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 수천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 등 공공이익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또 "나아가 결정에서 주어진 유예기간 중에 그 후에도 고객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SK, 미국내로 배터리 수출금지… 북미 생산·영업 타격
SK이노베이션으로서는 이번 ITC의 판결로 북미 지역에서 배터리 생산 및 영업 활동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약 3조원을 들여 미국 조지아에 21.5GW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약 9.8GWh 규모의 제1 공장은 올해 상반기 중 시험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며 내년 중 본격적인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또한 2023년 초에는 11.7GWh 규모의 제2공장도 양산에 돌입해 제1, 2 공장에서 연간 총 21.5GWh 규모의 설비를 가동하는 것이 당초 목표였다.
이를 통해 폭스바겐과 포드 등 고객사에 배터리를 제공할 예정이었지만 이날 ITC의 판결로 현지 배터리 공급은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ITC는 이날 기아와 폭스바겐 및 포드 일부 차종엔 2년, 포드 일부 차종엔 4년간 공급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SK이노베이션이 조지아 공장 건설기간을 감안할 때 2년의 한시적 공급 허용도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업계 해석이다.
이 기간 포드와 폭스바겐은 SK이노베이션을 대체할 공급사를 찾을 것으로 예상돼 SK이노베이션의 현지 시장점유율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ITC, 유예기간 부여…바이든 거부권 무산되나
배터리 업계의 시선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ITC의 최종 결정을 대통령이 거부하면 SK이노베이션으로선 미국 사업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은 수입금지 조치가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에 한해 ITC 최종 결정일로부터 60일 이내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으로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일말의 기대를 거는 상황이다.
실제 ITC 최종 판결을 앞두고 일각에선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유력하게 검토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6일(현지시간) “SK에 수입금지 조치가 내려질 경우 SK 배터리를 사용하는 포드와 폭스바겐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며 “만약 ITC가 LG의 손을 들어준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현지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전기차 산업의 성장을 통해 탄소중립 및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는 점도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제시됐다.
다만, ITC가 완성차업체 공급 중단 사태를 방지하고자 유예기간을 둔 만큼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명분이 없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LG·SK 갈등봉합 급물살…합의금 최대 관심사
이제 최대 관심사는 양사의 합의 여부다.
ITC의 최종 판단까지 받은 만큼 양사가 이를 계기로 비로소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린다. 특히 LG로선 이날 승소로 이전보다 더욱 유리한 위치에서 SK와의 합의금 협상에 임할 수 있게 됐다.
SK는 향후 10년 간 미국으로 배터리 부품·소재를 수출할 길이 막혀 이를 조기에 해제하기 위해서라도 합의가 시급한 상황이다.
쟁점은 합의금 규모다. 앞서 LG와 SK는 대표이사(CEO) 회동 등을 통해 합의점 찾기에 나섰지만 합의금 액수를 두고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해 22개월 간 장외공방을 벌여왔다.
재계에 따르면 LG는 적정 합의금으로 2조~2조8000억원을, SK는 6000억원 수준을 제시해 1조원 넘게 차이를 보였다. 양사가 막판 합의를 중단하고, ‘ITC의 최종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전략을 고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ITC가 사실상 LG의 손을 들어주면서 향후 협상 테이블에서도 LG로 무게추가 쏠릴 것으로 보인다. SK의 영업비밀 침해 수준과 SK가 미국 현지에서 수주한 배터리 규모 그리고 LG의 2년간 변호사 비용(약 4000억원 추산) 등을 산정해 최종 합의금이 결정된다.
협상은 설 연휴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양사 실무진과 법률 대리인들이 합의 논의에 물꼬를 트고, 이후 대표이사가 나서 최종 합의안을 확정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업계 일각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차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공식 취임하는 3월 말 이전에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만나 종결지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ITC의 최종 결정 이후에도 양사가 항소 제기와 지방법원 민사소송 등으로 법적 분쟁을 이어갈 여지는 아직 남아 있지만 글로벌 완성차 고객사들의 우려를 고려할 때 더 이상 합의를 미루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최근 양사에 공개적으로 합의를 촉구한 것도 부담이다. LG와 SK는 이러한 대내외 우려를 의식해 지난 달 콘퍼런스 콜에서 ‘ITC 결정 후 합의’를 시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