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 두문동 72현, 임진왜란 父子 의병

“종가 보다 무월마을”, 체험프로그램 인기

왕실과 겹사돈…여류 문인 송덕봉 배출

물염정 마주 본 동복(화순)적벽 명승 지정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군부는 고려 충신들의 저항에 직면한다. 결국 군부의 뜻대로 고려가 문을 닫자, 많은 충신과 지식인들이 수도인 개경 인근 광덕산 두문동에 은거한다. ‘문을 닫아 걸고 나가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다.

‘두문동 72현’ 중 한명인 고려말 문하시중 송계가 홍주(지금의 홍성)로 이주해 문을 연 가문이 홍주송씨이고 후손들이 담양 화순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송계의 손자 송평은 15세기 세조 때 벼슬을 하다가 처가의 세거지 담양에 입향해 중시조가 됐다.

송평의 둘째딸은 양녕대군(태종 장남)의 손자 이사성과, 아들 송기손은 효령대군(태종 차남) 손녀와 결혼했다. 세종대왕(태종 삼남) 형제들과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초 연산군 때 ‘임금 어머니의 피묻은 적삼’이 등장하고, 이어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불똥을 맞는다. 사돈 둘(최영한,이인형)이 각각 석고대죄 중 아사하거나 부관참시당하면서, 홍주송씨 가문도 그 여파를 입은 것이다.

송기손이 남평현감을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가문을 지탱하는데 온 힘을 쏟았고, 아들 대에 이요당공파(송준), 우유당공파(송숙), 청심헌공파(송구) 등으로 분파했다.

사헌부감찰을 지낸 송준은 조선의 여풍당당 문인 송덕봉(1521~1578)을 낳았다. 여성의 능력을 존중해준 사돈 선산류씨 문절공파와 사위 류희춘(1513~1577)의 양성평등 마인드에 힘입었다. 송덕봉의 얘기는 남편 류희춘과의 교감이 매우 중요하므로, 류씨 가문을 소개할 때 자세히 전한다.

담양 남쪽 고을과 같은 생활권인 동복(화순)의 적벽과 홍주송씨 청심헌공파 종가가 세운 물염정 [문화재청]
담양 남쪽 고을과 같은 생활권인 동복(화순)의 적벽과 홍주송씨 청심헌공파 종가가 세운 물염정 [문화재청]
물염정 근경
물염정 근경

청심헌종가를 연 송구는 동복현감을 역임했으며, 장남인 송정순과 함께 지금의 담양군 가사문학면에서 10㎞ 가량 남쪽에 있는 동복호 적벽 절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물염정(勿染亭)을 지었다. ‘물들지 말고 깨끗하라’는 뜻의 ‘물염’은 송정순의 호이다. 동복현의 적벽은 물염적벽이라 부르다 지금은 관할하는 지자체 이름을 붙여 화순적벽라 불리는데, 2017년 국가명승으로 지정됐다.

이곳에서 교유한 인물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명현 중 한 명인 최산두(1483~1536)로, 송구의 조카사위 류희춘과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세자의 스승)를 지낸 김인후에게 가르침을 준 인사다.

청심헌종가의 자랑인 물염정은 숱한 명문에 등장한다. 송정순(사헌부 감찰 등 역임)이 자신의 사위 나무송에게 물려줘 나씨 가문이 관리한다.

송구의 차남 송정황은 김인후의 문인으로 홍문관정자, 전라도사 등을 역임했고, 한국철학 양대산맥의 거두 기대승의 ‘주자문록’ 집필 때 발문을 지었다.

담양 홍주송씨 청심헌종가 입구의 무월마을 정자와 보호수, 목탁바위
담양 홍주송씨 청심헌종가 입구의 무월마을 정자와 보호수, 목탁바위
담양 홍주송씨 청심헌종가의 작은 박물관
담양 홍주송씨 청심헌종가의 작은 박물관

송정황의 아들 송제민은 주역의 대가 이지함에게 배웠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 양산숙과 함께 김천일을 맹주로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 고경명과 의병 연대했으며, 호남 방어를 위해 각지로 격문을 내고 김덕령과 함께 활약했다. 송제민은 운암서원에 배향됐다.

송제민의 아들 송타(1567~1597)는 고경명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정유재란 때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압송되던 중 조선 포로들을 규합해 왜군을 무찌르고 순절했다.

5세 송상인은 담양 대덕 무월마을로 종가를 옮겼고, 현재 19세에 이르기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는 기반을 닦았다.

성애경신(誠愛敬信)이 가훈인 홍주송씨 청심헌공파는 종택 유지보다 마을공동체 번영에 앞장서고 있다. 참여해 본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무월마을 농촌체험 프로그램’은 신축년 여행이 시작될 때, 가족탐방 버킷리스트에 넣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