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라면 2002년 한일월드컵이 주는 열기와 설렘을 지금도 잊지 못할 것이다. 광장을 가득 메운 응원행렬, 전 국민을 대동단결시킨 짜릿한 명승부는 지금도 가슴 뭉클한 느낌을 자아낸다. 당시 한국 경제는 휴대폰·반도체·조선 등의 고른 호조로 두 자릿수 수출증가율을 기록하고 ‘IT 선도자’라는 이미지까지 얻어 ‘다이내믹’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반면 근래의 한국이 처한 상황을 보면 과거의 역동성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경제적·사회적 변곡점에서 국가경제가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산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과거의 ‘산업보국’ 프레임에서 벗어나 ‘혁신보국’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부 입장에서 혁신보국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돼야 할까? 바람직한 예를 들어보자. 스웨덴은 ‘테스트베드 스웨덴(Test Bed Sweden)’이라는 철학 아래 산학연이 참여하는 범국가적 테스트베드를 추진해 유럽에서 모범사례로 평가받는다. 2014년 세계 최초의 자율주행차 테스트베드인 ‘아스타제로(AstaZero)’를 완공해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혁신기술을 실증할 기회를 제공하고 범국가적 혁신과제를 총괄하는 혁신청을 설립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율주행시대에 변화할 교통법규 등에 대비해 테스트베드 설계 시 규제담당자가 참여해 기술과 규제의 미스매치를 사전에 방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제당국자를 테스트베드 설계에 참여시키는 통찰력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또 하나의 예로 독일 정부는 전 세계 스타트업을 초청해 독일 대·중견기업에 오픈이노베이션 기회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저머니(Startup Germany)’라는 프로그램을 해마다 진행한다. 얼핏 보면 독일 대·중견기업을 위한 프로그램 같지만 해외 스타트업이 독일에 진출하면 고용창출, 혁신생태계 조성 등 독일 경제에도 득이 된다. 정책의 유연성이 돋보이는 사례다.
기업 입장에서 혁신보국은 어떤 형태를 지닐까? 미국과 중국의 가전, 유아용품, 금융, 철강 등 이업종 대기업들은 멤버십 방식으로 제3의 스카우팅 법인을 만들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 유망 기술을 기존 밸류체인에 지속적으로 접목하고 있다. 국내 유명 세탁 프랜차이즈에 대형 세탁기를 납품하는 이탈리아 중견 기업은 세탁산업에 신기술을 접목하기 위해 별도의 액셀러레이터(AC)까지 설립했다.
유럽연합(EU) 조사에 따르면 36개에 이르는 오픈이노베이션 우수 대기업 가운데 45%는 해마다 50개 이상의 스타트업과 개방형 혁신 협력을 하고 있다. 해외 대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기술접목을 위해 자발적으로 추진 중인 합종연횡의 형태를 보면 한국 기업들은 다소 경직돼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한국 혁신생태계의 잠재력은 충분하다. 대기업과 국책연구원에서 양질의 연구인력들이 기술 스타트업을 꾸준히 창업하고 시장 트렌드에 밝은 전문가들은 시장을 선도하는 플랫폼사업으로 동남아로 진출하고 있다.
국내 스타트업과 협력하는 해외 대기업들은 우리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선진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평가한다. 이는 2019년 한국의 딥테크(Deep Tech) 기업 수가 329개로 전 세계 6위 수준라고 밝힌 보스턴컨설팅의 보고서에서도 이미 입증됐다.
마침 무역협회와 산업은행은 국내 최대 스타트업 박람회인 ‘넥스트라이즈 2020’를 23일부터 이틀간 코엑스에서 개최한다. 글로벌 대기업 89개사, 국내 스타트업 875개사가 참가해 사전 매칭한 온·오프라인 비즈니스 미팅만 2000건이다. 4차 산업혁명 기술, 언택트, 헬스케어, 소재 부품장비 등 내로라하는 스타트업 제품과 서비스를 전시하고 골드만삭스, 로레알, 마켓컬리 등이 연사로 나서는 글로벌 콘퍼런스도 동시에 진행한다. 그야말로 ‘스타트업 축제’다. 당연히 행사장 방역도 철저히 이뤄질 예정이다.
2020년은 대한민국이 혁신보국의 기틀을 닦는 원년이 돼야 한다.
신승관 한국무역협회 전무 겸 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