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카이로=함영훈 기자] 현대문명에 관한한 한국을 따라배우려는 나라 중 하나로 꼽고 있는 이집트는 ‘코로나19’ 사태 와중임에도 2020년 3월 10일 오후 현재, 한국 체류-경유 외국인에 대한 입국제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공식 제한 않지만, 지금은 이집트여행 자제를= 다만, 9일 룩소르에서 한 나일강 크루즈선에 탔던 한국인 11명이 배 안에서 수 시간 검사를 받았고, 룩소르내 다른 호텔에 있던 한국인 개인여행자도 검사를 받느라 몇시간 호텔에 있었다. 지금 당장 이집트 탐방은 이런 불편함이 있는데, 다른 109개국에 비하면 건강한 여행자로선 덜 불편한 나라이다. 카이로 주재 한국대사관은 일단 당장 이집트 여행오는 것은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지난 1월말 이집트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1차탐방을 했다. 카이로공항에서 내려 시내로 가는 길은 나세르 가도를 달리게 된다. 아갈 압둘 나세르 전 대통령의 이름을 붙인 길이다. 아스완댐 공사로 더 커진 누비아 지역 거대호수 이름도 나세르호이다. 독립 쟁취, 비동맹회의 사무총장, 아프리카단결기구 회장, 아랍연합공화국 총리 등을 맡으며, 이집트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높였지만, 경제산업 부문의 업적은 의지 만큼 따르지 못했다. 현재 이집트는 1인당 소득 집계가 가능한 180여개국 중 110위권으로 앙골라, 스리랑카와 비슷하다.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2000~3000년 전 이집트 도자기 기술을 보면, 도기-청자-백자에 관한한 자부심이 컸던 한국인들도 움찔 한다.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문명의 선구자였다가 현대문명을 쫓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집트 카이로엔 공사중인 건물이 많다. 이 공사현장 꼭대기에 두개의 피라미드(왼쪽 쿠푸, 오른쪽 카프레)가 솟아나 있다.

▶문명발상지에서 현대문명 따라잡기 안간힘= 나세르 가도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에선 초록과 황토색이 군데 군데 섞인 땅 위로 도시 리뉴얼 공사가 한창이다. 나대지 주변에 하릴없이 서 있던 도로변 담벽에는 어김없이 유럽식 크래피티를 누군가 그려놓았다. 부유층이 꽤 있음을 보여주는 사립학교 건립 소식도 들려왔다.

웬만큼 큰 돈을 가진 입주자가 확정되지 않는 한 준공 검사를 먼저 맡으면 막대한 세금을 내야하기 때문인지, 골격 공사를 다 해놓고 미장과 인테리어만 안한 미완성 건축물이 많았다. 지어놓기 전에 금새 팔리는 한국과 다른 이유는 전주(錢主)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가통신, 첨단자동차 산업 도입과 벤치마킹에 나서는 등 선진 기술을 배우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고 한다.

고대문명을 이끌던 카이로는 그렇게, 현대 문명을 뒤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개발 도상의 나세르가도변 풍경과는 달리, 이미 선진국 부촌(富村)급으로 성장한 ‘카이로의 맨하탄’ 게지라섬에서 동쪽으로 ‘10월6일 다리’ 나일강을 건너자 마자 만나는 이집트박물관은 찬란한 고대문명의 발상지 다운 유물로 가득하다. 10월6일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람세스의 업적 ‘셀프 거양’ 도처에= 발품으로 탐구하던 이집트 문화인류학을 한 건물 안에서 되돌아보고, 말로만 듣던 국보,보물을 코 앞에서 보는 곳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앞마당 맨 앞에 투탕카멘 얼굴을 한 사자몸체 석상이 반기고 그 뒤 연못 안팎엔 이집트의 상징인 연꽃과 파피루스가 각각 심어져 있다.

케디브 아바스 헬미 2세가 재위중이던 1897년에 착공돼, 1902년 11월 15일 개관한 박물관엔 12만점의 유물을 연대기순으로 배치한 107개의 전시실이 있다.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이집트박물관의 하이라이트, 투탕카멘 전시실의 투탕카멘 마스크.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이집트 박물관 외관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카이로 나일강 동쪽 강변에 있는 이집트박물관 내부

1층엔 부인인 네페르타리 모습을 다리에 조각한 람세스2세 석상이 반기고 2층에는 투탕카멘 왕의 유품과 11명의 왕-왕비의 미이라를 만난다.

람세스 2세 재위기간이 길고 스토리도 많으며 태평성태를 구가한 때라 그런지 1층의 석상중엔 그 부부를 표현한 것이 참 많다. 국왕신(神) 호루스의 매 조각상 앞에도 람세스가 있었다. 좌상은 람세스와 하토르여신이 나란히 앉아있고, 그 가운데 부인 네페르타리의 작은 입상이 끼어 있다. 상이집트, 하이집트 황제관을 쓴 두 석상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도 눈길을 끈다.

2층에 가면 파라오 및 왕족의 관과 마스크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파피루스로 엮은 ‘조리 슬리퍼’도 수천년전에 만들어 신었다는 설명도 보인다. 왕족이나 귀족이 살아 생전 뭘 했는지 가로로 긴 그림으로 묘사한 액자도 눈길을 끌었다. 산 자들이 자신을 좋게 기억해주길 바라는, 떠나기 전 ‘미련’이 느껴진다.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왕족, 귀족이 자신의 일대기와 업적을 그린 스토리그림 액자

▶수천년 도자기 기술, 한국의 자부심도 놀랐다= 세계적인 비취색 상감고려청자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한국인 관람객이 놀랄만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그림이 정교한 비정형 도자기와 왕족과 귀족이 악세사리로 간직하던 구운 토우이다. 고려청자의 신비스런 비취색은 아니지만, 푸른색 토우를 구운 것이 3000년전이라는 설명문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정형 모양새에 무늬가 섬세한 물병 모양의 도기도 그 즈음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어떻게 흙을 빚어 굽는지 ‘단발머리’ 처럼 보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제작 개념도까지 있다. 도기, 청자, 백자의 선구자 나라로서 자부심이 컸는데, 시차와 기술력의 차이는 있지만, 이집트 도자기의 유구한 역사 앞에서, 그들이 우리 배달민족 만큼의, 어쩌면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진 민족이라는 점이 느껴졌다.

요절한 소년왕, 투탕카멘의 전시실이 하이라이트이다. 도굴이 두려웠는지, 투탕카멘의 관과 부장품은 다섯 겹으로 포장돼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보다 약간 작은 금장 방(房)에 다시 작은 금장 방을 집어넣고, 다시 더 작은 방을 집어 넣는 식이다. 명절 선물 과대포장하듯 겹겹이 보안유지를 도모했다.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투탕카멘이 쓰던 장난감과 악세사리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발굴당시 투탕카멘의 방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금장 왕좌

▶투탕카멘王 관심사, 정사(政事) 보다는 놀이?= 투탕카멘 부장품 방의 최초 촬영사진을 보면, 그 안에는 동물 모양 목마형 장난감, 수레 바퀴, 귀중품 주얼리 박스, 자칼 등 동물 조각품, 북(鼓) 등이 있었다. 진귀한 것은 관 안에 있었는데, 금과 옥으로 만든 파라오 인형, 금으로 만든 동물 인형, 호루스의 매 형상 금 장식품, 금 목걸이, 반지, 금으로 만든 그릇, 크고 작은 금속병(甁) 등이었다.

순금의 무게만 11킬로그램이 넘는다는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에 시선이 머문다. 이 박물관에선 투탕카멘 전시실에만 관리인이 전담 배치돼 촬영을 유물 별로 윤허-불허하는 등 매서운 눈빛으로 지키고 있다. 투탕카멘의 관은 절대 찍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황금 마스크 주변에선 지구촌 여행자들의 안광(眼光)이 마스크를 철(徹)할 정도로 빛난다.

현재 국가 차원에서 새로운 이집트 박물관을 공사 중인데, 오는 가을 준공되면 곧 이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된 막대한 양의 유물들도 모두 전시된다.

[新이집트 탐방기⑬] 카이로, 옛것·새것 두 가치에 대한 단상 [함영훈의 멋·맛·쉼]
이집트의 전성기를 이끈 람세스2세왕과 하토르여신 석상. 이집트 박물관 내 있는 큰 석상 사이에 람세스의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상이 있다.

▶문명개척 자부심, 현대문명 추격도 빠를듯= 이집트가 지금으로부터 6000~3000년전 인간 문명을 처음 만들고 이끌었기에, 추격자들의 견제는 심했을 것이다. 결국 지중해, 홍해 주변국들은 힘을 키워 이집트를 침략, 지배할 때, 수천년 이집션들에게서 느끼던 열등감을 모질디 모진 파괴와 약탈, 도굴로 만회하려 했으리라 싶다. 이집트가 알렉산드로스 왕의 내침 이후 나라를 되찾는 데, 무려 2300년이 걸렸다.

오랜 핍박과 체념이 어느덧 국민심리, 생활문화가 되긴 했겠지만, 그래도 나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일군 찬란한 문명을 보면서, 현대문명을 빨리 따라잡겠다는 동기부여는 여느 개발도상국 보다 셀 것으로 보인다.

○‘新이집트 탐방기 글 싣는 순서’ ▶2월11일자 ①아이다 공주의 누비아가 없었다면… ②스핑크스 틀렸다, 수호신 호루스가 맞다 ③소년왕 투탕카멘 무덤방은 장난감房 ④에드푸의 반전매력, 에스나 물살 제어기술 ⑤나일강물 맛 보면, 나일로 꼭 온다 ▶2월18일자 ⑥제정일치 룩소르, 신전은 王와 神의 토크라운지 ⑦3500년전 모습 왕가의 계곡…멤논 울음 미스터리 ⑧권력 탐한 모정, 너무 나간 아들 ‘핫-투’ 갈등 ▶2월25일자 ⑨석공의 눈물 밴 미완성 오벨리스크 ⑩호텔이 된 왕궁, 시장이 된 옛호텔 ▶3월3일자 ⑪아스완-아부심벨, 곳간에서 문명 난다 ⑫필래와 콤옴보 문명 덧쓰기, 없애기 ▶3월10일자 ⑬찬란한 박물관, 개발중인 도시, 두 풍경 ⑭신비의 사막 탐험, 홍해 레저 반전매력 ⑮미사포야? 히잡이야? 문명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