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조작’ 최전선 신경과학자의 기록
‘엔그램’ 가설부터 기억 조작의 현주소
기억 바꾸는 치료의 도덕적 논란 불구
“치매 치료 등 선한 목적으로 사용돼야”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아내를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마크는 슬픔을 잊기 위해 루먼 인더스트리가 제안한 ‘단절(Severance)’ 시술을 받는다. 직장 생활의 기억과 사생활의 기억을 완전히 분리하는 시술이다. 시술을 받은 마크는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 층으로 내려가는 순간, 또 다른 자아 ‘이니(Innie)’가 돼 근무 시간 동안만큼은 아내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지낸다. 그 시간만큼은 슬픔도, 상실감도 남의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지우려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전 연인 클레멘타인이 시술로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조엘이다. 충격에 빠진 조엘은 자신도 클레멘타인을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한다. 하지만 시술 중에 그는 힘들었던 순간만큼이나 눈부시게 행복했던 시간들을 발견한다. 결국 조엘은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의 손을 잡고 도망치며, 서로를 사랑했던 그 순간을 지키려 한다.
지난해 프라임타임 에미상 8관왕에 오른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 그리고 클래식 멜로 ‘이터널 선샤인’(2004)은 방법은 다르지만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동일한 설정을 공유한다. 기억을 지우거나 바꿀 수 있다는 상상은 ‘토탈 리콜’(1990)이나 ‘맨 인 블랙’(1997), ‘인셉션’(2010) 등 할리우드 흥행작들이 자주 쓰는 단골 소재다. 중요한 건, 이러한 기억 조작이 더 이상 SF(Science Fiction)나 판타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스티브 라미레스는 저서 ‘기억을 바꾸는 법’에서 할리우드가 그려온 기억 조작이 현실에서 더 정밀한 수준으로 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기억 조작에 대한 여정과 고찰은 ‘기억이 뇌에 흔적을 남긴다’고 주장한 100년 전 독일 동물학자 리하르트 제몬의 ‘엔그램’ 가설에서 출발해, 광유전학 같은 도구로 기억을 실제로 변형시키는 오늘날 신경과학의 현주소까지 아우른다.
저자는 MIT 박사과정에 합격한 후, 기억의 생물학적 기반을 연구하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도네가와 스스무의 연구실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멘토 ‘쉬 류’를 만나 기억 조작 프로젝트에 조금씩 발을 들인다. 20세기 과학자들의 성과와 뇌세포 활동을 제어하는 신경과학 도구를 이용해 두 사람은 지난 2012년 안전한 환경에 있는 쥐에게 공포 기억을 재활성하는 ‘프로젝트 X’를 성공시킨다.
이후 쥐에게 가짜 기억을 심는 ‘프로젝트 인셉션’, 긍정적 기억을 활성화해 우울과 불안을 줄이는 후속 프로젝트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기억 조작 분야의 주요 연구자로 자리매김한다. 저자는 “(오늘날) 신경과학의 도구 상자는 너무나 정교해져서, 이제 문제는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기억을 얼마나 오래 조작할 수 있느냐’가 됐다”고 짚는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할 때도, 과거의 기억을 가져와 그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려본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기억이라는 모래알은 과거의 세계를 짓는 데만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모든 가능한 모래성을 쌓는 데도 쓰인다”. 그렇다면 당연히 실현될 거라 믿었던 미래가 갑자기 불가능해지면, 뇌는 어떻게 반응할까.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 안으로 통합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뇌가 이전의 희망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현실과 부조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현실을 마음의 기대 속에 다시 집어넣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저자는 멘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러한 부조화를 몸소 겪었다. 10여년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살던 그는 죽을 위기를 겪은 뒤 죽음의 비통함 대신, 함께한 소중한 기억들로 삶의 이정표를 다시 그리기로 했다. 그는 지우고 싶은 기억에 대한 대화 중 쉬 류가 남긴 말을 떠올린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모두 나야.”
저자는 “중요한 건 어떤 기억을 삭제하는 게 아니라, 그 기억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라며 “부정적인 경험의 기억을 주체적 감각을 되찾는 기회로 바꿀 때, 우리에게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억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상처 입은 기억이 오히려 회복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저자는 기억 조작 기술이 지닌 윤리적 함의에 대한 고민도 이어간다. 그러면서 “기억이 삶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면, 그 힘을 인류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선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많은 SF가 기억 조작이 빚어내는 디스토피아를 그려왔지만, 그는 이 기술이 우울과 불안, 치매 치료 등 더 나은 삶을 위해 쓰이는 미래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저자는 “기억 편집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고, 이 기술은 사회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면서 “책임 있게 투여되는 약물처럼, 기억 편집 치료도 개인에게 맞춰지고 인간이 최우선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억을 바꾸는 법/스티브 라미레스 지음·김명주 옮김/김영사
balm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