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이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자리잡으면서 국민들의 관심과 이해도도 크게 높아졌다. 그중에서도 반도체 시장에서는 공급과 수요의 불일치로 인해 공급과잉과 부족이 번갈아 발생하는 사이클이 있다는 것은 일반 상식과도 같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러한 사이클이 발생하는 것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기업들의 투자는 멈추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이다. 공급과잉으로 인한 경기 불황이 예측되는데도 반도체 기업이 생산 공장을 계속 건설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경쟁방식과 관련이 있다.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 위기와 함께 메모리반도체 가격 폭락으로 세계 메모리반도체 기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었고, 치열한 증설 경쟁과 두 차례의 치킨게임을 거치면서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만이 온전하게 살아남아 지금의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2010년대 초반 치킨게임 이후에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발생한 흥미로운 변화는 제조 기업의 가격 결정권이 약해지고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시장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메모리반도체는 빠르게 표준화가 되면서 동일한 규격의 제품이 시장에서 유사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기업이 독자적으로 판매가격을 결정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치킨게임 이후 메모리반도체 기업의 경쟁방식은 가격 경쟁에서 기술과 생산능력 경쟁으로 바뀌게 됐다.
우선 신제품을 먼저 출시한 기업은 초기 시장에서 가격 프리미엄을 확보할 수 있으나 후발 기업들이 비슷한 제품을 양산하기 시작하면 가격은 빠르게 하락한다. 따라서 메모리반도체 기업은 지속적으로 다음 세대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첨단 설비를 확보해야 한다.
생산규모 확대도 중요하다. 판매가격이 시장에서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생산량과 원가경쟁력이 매출과 수익성을 좌우한다. 생산능력이 큰 기업일수록 고정비를 분산하고 단위당 생산비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메모리반도체 기업은 경기 불황과 공급과잉 가능성을 알고도 기술 선점과 규모의 경제를 위해 공장 건설을 멈추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신공장 건설로 인해 공급과잉이 발생한다면 어차피 수익이 악화할 텐데 왜 기업은 투자를 멈추지 않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불황 뒤 호황기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호황기에 접어들었는데 경쟁사보다 생산능력이 부족하면 호황기의 수혜가 줄어들고 다음 신제품을 계획할 자금 확보 경쟁에서 뒤처지게 된다.
따라서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공급과잉을 두려워하면서도 투자를 멈출 수 없는,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경쟁 산업이다. 오히려 불황기에 투자한 기업이 다음 호황기의 승자가 된다. 그래서 메모리반도체 기업이 공장 건설을 멈추는 것은 비용을 아끼는 선택이 아니라 미래 시장을 경쟁사에 내주는 선택이 된다. 오늘 건설하는 반도체 공장은 내년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5년 후 혹은 10년 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투자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연구실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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