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붉은악마 출범 당시 멤버였던 김수한 기자의 축구 이야기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한국:중국 전은 한국 축구가 이제 선진축구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 경기라고 본다.
한국과 중국의 경기력 수준이 다름이 분명히 드러난 경기였다.
이로써 한국의 중국전 역대 전적은 18승 12무 1패를 기록하게 됐다.
원래 한국은 중국을 상대로 축구에서 져본 적이 없다. 중국이 한국과 축구만 하면 지니까 공한증(恐韓症)이란 말까지 생겼다. 쉽게 말해 중국 축구선수들이 한국을 두려워하는 병이란 뜻이다.
지난 2010년 2월10일 일본 도쿄 아지노모토 경기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에서 3:0으로 진 게 유일한 중국전 패배다.
당시 패배는 우리로서는 충격적이었지만, 국제 축구계에서 동아시안컵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다행스럽기까지 한 패배였다.
당시 허정무 감독은 이 패배에 대해 아쉬움을 금치 못했지만 “언젠가 올 일이었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또 “중국 선수들 기량이 좋았다. 중국에 축하를 보낸다”며 신사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 “이 패배가 독보다 약이 될 것”이라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이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우리 팀은 더욱 힘을 냈다. 4일 후인 2월14일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일본전에서 역대 전적상 중국보다 어려운 상대로 꼽힌 일본을 3:1로 이겨 자존심을 회복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한국을 이긴 중국(7점)이 한국(6점)보다 승점 1점이 높아 동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으니 첫 중국전 패배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우리 대표팀은 그 이후 5년간 중국에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여전히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이번 경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전력상 뚜렷한 우위 보인 한국, 왜 흔들렸나=한국은 전력상 한 수 위였다. 중국대표 11명은 ‘여전히’ 하프라인을 쉽게 넘어오지 못할 정도로 공한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가 경기 중에 선보인 빛나는 플레이 역시 우리 대표팀의 압도적 실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날 들어간 3골은 모두 실제 경기에서 일어날거라 상상하기 힘든 예술적 작품에 가까웠다.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을 만나 대등한 경기를 펼칠 정도로 국제 수준에 올라온 ‘팀 코리아’의 선진축구가 중국을 만나자 아트사커의 진면모를 보인 것이다.
특히 손흥민이 왼쪽으로 번개처럼 돌파해 중국측 골라인 직전 아슬아슬하게 골에어리어로 강하게 패스하자 뛰어들던 지동원이 뒷축으로 공 방향을 슬쩍 바꿔놓고 이를 쇄도하던 구자철이 강하게 슈팅해 세 번째 골을 넣은 장면은 이날 경기의 백미였다. 또한 올해 한국 축구대표팀이 넣은 가장 멋진 골 베스트 3에 드는 예술적 골이었다.
마술과 같은 이 골에 너무 도취되었던 것일까.
이쯤되자 JTBC 축구 해설위원으로 나선 이천수와 유상철은 ‘중국은 한국을 못 넘는다’는 둥 도를 넘은 발언을 여과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의 말은 결코 이들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던 선수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훨씬 앞서 있다. 중국은 우리를 앞으로 당분간 넘보지 못할 것이다’는 생각을 모두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방심의 기운이 선수, 해설자, 국민들에게 충만하던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중국 축구영화 ‘소림축구’에 나오는 주성치처럼 중국 선수들은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 같은 그 순간, 마치 영화 속 주성치처럼 고수의 아우라를 풍기며 침착하게 2골을 넣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우리 선수들이 후반전 20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완전히 승리에 도취돼 어쩔줄 몰라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스페인, 독일, 브라질과 같은 전통 축구강호와 우리가 다른 점이었다.
▶근성의 한국축구 DNA, 이젠 ‘축구강자’ 자존감 더할 때=한국은 지금까지 세계의 높은 벽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선진축구를 따라가는 입장이었다. 우리로서는 악착같이 쫓아가 열세인 판세를 우세로 뒤집는 것만이 세계 축구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 28년간 우리 축구는 계속 뒤쫓아가는 축구를 했다.
그래서 1:0으로 지고 있을 때 가장 투지가 넘친다. 지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고 있으면서 파상공세를 퍼부어 기적적으로 만회골을 넣는 정서에 익숙하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불가리아전에서 1:0으로 지고 있다가 1골(김종부)을 만회한 것이 우리 특유의 강점이었고,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독일을 3:2(황선홍, 홍명보)까지 쫓아간 경기 역시 그런 특유의 저력이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에서 1:0으로 지고 있다가 막판 만회골(유상철)을 넣은 것도 역시 한민족 월드컵 정신의 계승이었다.
2002년 16강전 이탈리아전에서 1: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 막판 만회골(설기현)을 넣은 장면에서도 우리의 그런 정신은 발현됐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프랑스에 1:0으로 끌려가다 종료 9분여 전 만회골(박지성)을 넣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2002년 이후 최초로 16강에 진출해 만난 우르과이와의 16강전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경기 초반(8분) 수아레스에게 일격을 당해 1:0으로 끌려가다 후반 23분 만회골(이청용)을 넣은 것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벨기에와 후반 막판까지 팽팽한 접전을 펼치다가 결국 1:0으로 진 것도 양상은 비슷했다.
즉, 우리의 축구 DNA에 축구 전통강호의 ‘끝까지 우세를 유지하는 능력’이 빠져 있는 것이다. 어쩌다 대등하거나 우위의 상대에게 선제골을 넣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쩔 줄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의 수준은 날이 갈수록 진보해 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 브라질 등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는데 우리에게 2%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자존감’이 부족한 것이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우세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기고 있을 때 더욱 철저히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냉정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DNA에는 그런 게 부족하다. 언제나 강호를 쫓아가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한 축구강국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부족한 그 2%를 채워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키는 기술’이란 우리가 이기는 것을 당연시할 줄 아는 높은 자존감이다.
이제 우리가 정상으로 가느냐 마느냐는 기술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멘탈'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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