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방치된 차량 사회적 문제로
점유 의사만 밝히면 강제 견인 불가
경찰·지자체 ‘속수무책’ 사각지대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다세대주택 주차장에는 지난 1년 6개월간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트럭이 있다. 먼지가 뽀얗게 덮인 이 차량의 주인을 봤다는 주민은 아무도 없다.
이 주택 관리인인 A씨는 버려진 차량이라고 판단해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강남구청 직원들이 현장조사도 벌였다. 그러나 며칠 뒤 차량 유리창 와이퍼에는 ‘이사 중’이라고 적힌 A4 종이가 끼워졌고 구청은 “차주가 차량을 관리하고 있어 방치 차량으로 볼 수 없다”며 견인 조치가 어렵다고 했다.
사유지 내 장기 불법주차로 주민들은 몸살을 앓고 있지만 실효성 낮은 조항으로 행정력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불법주차 된 차량의 차주가 메모지 한 장을 붙여 “관리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면 차량을 견인할 수 없어서다. 그래도 방치된 차가 꿈쩍하지 않는다면 주민들은 법원 손해배상 등 민사소송을 진행하거나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여서 결국 차들이 방치되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600여가구 규모 아파트 지하주차장에도 몇 달째 자리만 지키고 있는 차량이 있다. 관리사무소는 차량 앞유리에 ‘강제처분 예고’ 경고문을 5장이나 붙였고, 아파트 곳곳 게시판에 ‘차량을 이동해 달라’는 안내문을 걸었다.
경기도 시흥시 월곶동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방치된 차량 60여대를 정리하려고 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절반 이상의 차량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차적 조회에서 차량 등록지가 단지로 나오면 견인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돌아온다”며 “민원이 매일 쏟아져도 행정기관은 손을 놓고 있다”고 토로했다.
방치 차량으로 이웃간 살인도…경찰, 지자체도 속수무책
불법주차 민원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22년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공동주택 등 사유지 내 주차갈등 해소방안’에 따르면 사유지 내 불법주차 민원은 2010년 162건에서 2020년 2만4817건으로 153배 폭증했다. 움직이지 않는 장기 불법주차 통계는 별도로 없으나 이 기간 역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불법 장기주차는 금전적인 피해까지 낳는다. 신사동 다세대주택 관리인은 “세입자를 들일 예정인데 주차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월세를 30만원이나 낮춰야 했다”며 “차량이 빠지기만 해도 손해를 막을 수 있는데 불법주차 하나 때문에 계약 조건까지 흔들리게 생겼다”고 토로했다.
![지난 2014년 경기도 부천 중동의 한 주택가에서는 40대 남성이 주차 문제로 다툰 적 있는 자매 2명을 흉기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YTN 방송 갈무리]](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16/news-p.v1.20250515.8bceee0896ff4dcab1016f83dc62845c_P1.png)
지난 2014년에는 주차 분쟁으로 살인사건까지 벌어졌다. 경기도 부천 중동의 한 주택가에서 40대 남성이 평소 주차 문제로 다툰 적 있는 자매를 흉기로 찔러 사망에 이르기까지 했다. 국민권익위는 “사유지 불법주차를 개인 간의 문제 또는 사적 자치의 문제로 방치하는 동안 주차 갈등은 살인에 이르는 등 사회적 이슈로 대두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문제는 사유지 내 장기 불법주차에 대해 지자체나 경찰 모두 사실상 대응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다세대주택 주차장은 공용도로가 아닌 사유지로 분류돼 경찰의 단속 대상이 아니다. 자동차관리법 시행령상 방치 차량 조항 역시 실효성이 낮다. 차량이 실제로 이동하지 않아도 차주의 점유 의사가 확인되면 지자체는 견인 등과 같은 행정조치에 나설 수 없어서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자동차 관리법상 사유지에 2개월 이상 방치하면 강제처리를 하게 돼 있는데 소유자가 차량을 포기한다는 확실한 의사가 있어야 견인할 수 있다”며 “한 달에 20건 정도 관련 민원이 들어와도 실제 견인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1년에 4건도 안 된다”고 설명했다.
강성수 법무법인 우린 변호사는 “차주가 차량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다’는 의사만 표시하면 법적으로 점유가 인정된다”며 “사문화된 법 때문에 피해를 보는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강제집행을 신청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g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