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단 9개월 만에 견습생에서 솔리스트로
러시아 발레 배워 미국 활동 상상도 못해
“ABT는 발레 인생의 전환점이자 성장 계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새하얀 피부의 동양인 발레리나와 깊고 검은 피부의 흑인 발레리노가 중력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루이스 모로 고트샬크의 밝은 음악에 따라 산들거리는 춤사위를 만들어낸 두 사람. 캘빈 로열 3세와 한국인 무용수 박선미의 파드되는 발랄하고 유쾌한 사랑스러움이 넘실거린다. ‘대질주 고트샬크(Great Galloping Gottschalk)’ 무대다.
연수생으로 시작해 솔리스트가 되기까지 고작 9개월. 박선미(26)는 1년도 되지 않아 아메리카발레시어터의 ‘새로운 미래’가 됐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열심히 했지만 시기와 타이밍, 그리고 운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기회는 없었을지도 몰라요.”
미국의 유명 무용 매거진 ‘포인트’는 2021년 11월 아메리칸발레시어터에서 준단원(견습)으로 시작해 2022년 9월 솔리스트가 된 그를 “ABT의 조용한 강함”이라고 소개하며 “당신이 아직 박선미를 알지 못한다면 곧 인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2023년이었다.
최근 13년 만에 내한한 ABT와 함께 한국을 찾은 박선미는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미국 무대에서 활동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열 살에 발레를 시작, 한국예술영재교육원과 선화예고를 거쳐 열아홉 살에 한예종에 입학한 그는 2019년 ABT 스튜디오 컴퍼니에 입단해 활동했다. 사실 박선미는 일찌감치 세계 유수 콩쿠르를 석권한 ‘발레 영재’다. 2017년 한국인 최초 모스크바 국제 발레 콩쿠르 1위, 2018년 유스 아메리카그랑프리 콩쿠르 시니어 파드되 부문 1위에 오르며 세계 발레계에 존재감을 보여줬다.
“ABT라는 발레단은 알고 있었지만 저 자신과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바가노바 스타일로 교육을 받아왔기에 미국 활동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고요. 운 좋게 입단 기회를 얻어 들어가 보니 ‘내게 이렇게나 잘 맞는 발레단이 있을 수 있구나’ 싶을 만큼 행복하게 보내고 있어요.”
박선미가 ABT와 함께 내한해 한국 관객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국 무대를 마친 그는 “사실 이번 공연을 앞두고 많이 떨리고 걱정도 컸지만 동시에 기대하는 마음도 컸다”며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은 부상이 있어 무대 전엔 아이싱과 테이핑을 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는데 무사히 무대를 마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돌아봤다. 박선미는 한국 무대에서 ‘대질주 고트샬크’와 ‘라 부티크(La Boutique)’에서 주인공을 맡아 무대에 올랐다.
ABT는 현재 2022년 부임한 새로운 예술감독인 수전 재피와 함께 ‘다양성의 실천’을 미션 삼아 창조적 예술을 가꿔나가고 있다. 19개국에서 온 다양한 무용수들이 어우러져 “서로 다른 개성과 에너지를 발산하며 다채로운 아름다움”(박선미)을 만들어낸다. 박선미는 ABT의 가장 큰 매력은 ‘다양성과 존중’이라고 했다.
그는 “ABT는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무용수들이 모인 곳이라 특정한 나라의 스타일이 두드러지기보다 각자의 개성이 더욱 잘 드러나는 발레단이라는 특징이 있다”며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춤 스타일과 표현 방식을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각기 다른 배경과 감성을 지닌 무용수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레단은 ‘철저한 계급사회’이지만, 다국적 무용수들이 어우러진 ABT에선 ‘경쟁의 부담’은 없다고 한다. 박선미는 “모두가 친구처럼 지낼 만큼 따뜻한 분위기”라며 “누군가를 이겨야만 살아남는 경쟁이라기보다, 각자가 최선을 다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느낌이 더 가깝다. 그래서인지 무대 위에서도, 연습실에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된다”고 했다.
한국인 무용수는 박선미를 포함해 수석 무용수인 서희와 안주원, 솔리스트 한성우, 코르 드 발레 서윤정까지 5명이다. 수전 재피 감독은 “한국인 무용수는 단연 실력으로도 최고이면서 무모할 정도로 성실하고 열심히 한다”는 공통된 특징을 들려주기도 했다.
박선미도 “한국 무용수들은 정말 겸손하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고, 무대 뒤에선 누구보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고 했다. 특히 “성실함과 끈기, 엄청난 연습량을 바탕으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힘이 있다”며 “이런 태도들이 한국 무용수들의 강점이자 무대 위에서 빛나는 이유”라고 봤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무용수는 러시아 바가노바 스타일의 발레 교육을 받는다. 한국인 무용수들이 영미, 유럽 발레단 진출 초기 겪는 어려움 역시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춰온 춤 스타일과는 다른 춤을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한다는 점이다. 박선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발레단에 입단한 후 다양한 스타일의 춤을 췄다”며 “특히 캐릭터 슈즈를 신고 불룸댄스를 춰야 하는 ‘시나트라 모음곡(Sinatra Suite)’은 큰 도전이었다”고 돌아봤다.
“첫 연습 날, 제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내가 이렇게 삐그덕거리다니?’ 하며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하지만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에 올랐을 때는 그 과정이 모두 보람으로 느껴졌고, 지금은 오히려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됐어요.”
박선미는 ABT에 입단하며 가장 달라진 점으로 ‘자신감’을 꼽았다. 발레단 이단 이후 주변의 따뜻한 격려와 응원은 그에게 고스란히 자신감이 돼 돌아왔고, ‘초고속 승진’이라는 새로운 이정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늘 조심하고 눈치를 많이 봤다”며 “이젠 무대가 두렵기보다 즐거운 공간이 되고 있다. 그 변화가 가장 큰 성장이라고 느껴진다”고 했다.
이제 겨우 입단 4년차,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그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당장의 목표’는 ABT의 주역이 되는 것이나, 무용수로 바라보는 더 큰 꿈은 따로 있다.
“춤은 제 인생 자체예요. 만약 춤이 없었다면 ‘박선미’라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 과정에서 ABT는 제가 발레를 더욱 사랑하게 된, 아주 큰 전환점을 만들어줬어요. 이곳에서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 관객들이 깊이 공감하는 춤을 추는 발레리나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