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무기가 되는 그림
153. 오귀스트 르누아르
“고통은 잠시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행복’ 그렸던 화가
그의 ‘반전’ 사연은

“내 사랑. 괜찮아요?”
“선생.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요?”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주변 사람들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왜 자꾸 멍하게 있어요? 혹시… 파티 시작도 전에 취한 건 아니죠?”
귀여운 연인 알린 샤리고가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선생. 영 수상한데요? 몰래 독한 술을 감추고 있으면 말해주세요. 비우는 걸 도와드릴 테니!” 동료 화가 겸 후원자, 귀스타브 카유보트도 미소와 함께 농담을 건넸습니다. “카유보트 씨!” 사리고의 진심 반 장난 반 호통에 곧바로 딴청을 피우긴 했지만.
이날 이 순간. 르누아르는 확실히 취해있기는 했습니다.
다만 그를 취하게 한 건 술이 아니었습니다. 기쁨, 설렘, 즐거움…. 그는 진한 행복에 젖은 채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햇살과 바람, 반짝이는 윤슬과 음식, 흔들리는 보트만큼 넘실대는 웃음소리.
이러한 분위기 속 그의 연인 샤리고는 강아지 아펜핀셔를 어르고 있었습니다. 거꾸로 된 의자에 몸을 댄 카유보트는 등받이를 흔들며 밖 풍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언론인 안토니오 마지올로, 흰 모자를 쓴 배우 안젤 레고도 이들 옆에서 훈훈한 기류를 만들고 있었지요.

옆 테이블도 활기가 가득했는데요.
실크햇 모자를 쓴 잡지 편집인 샤를 에프루시, 음료를 홀짝이는 모델 엘렌 앙드레, 남자들 틈에서 쑥스러운 듯 볼을 감싸는 배우 잔 사마리. 이 밖에도 관료, 문인, 사업가…. 모두가 유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틈에서 르누아르는 다시 지금 순간을 음미했습니다.
보트 위 그의 소중한 연인, 친구, 지인이 꾸리는 청춘물을 또 한 번 감상했습니다. 감격스러웠습니다. 그가 그토록 바란 행복의 장면이었으니까요.
르누아르는 이 모습을 그립니다. 제목은 <보트 파티에서의 점심 식사>. 환희와 두근거림으로 채운 작품은 즉시 그의 대표작이 됩니다.
르누아르가 이처럼 넉넉한 기쁨의 풍경만을 찾아 그린 덕일까요.
르누아르라고 하면 곱고 귀하게 큰, 말간 피부를 가진 도련님 화가의 일생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실은 반전이 있는데요. 정작 르누아르의 실제 삶은 그러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에게는 질긴 가난, 절친의 사망, 죽음의 위협 등 슬픔과 통증에 절인 시절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알고 보면 그의 여정은 본인 그림처럼 마냥 해맑지도, 산드랗지도 못했던 겁니다.
르누아르에게는 지금껏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보트 파티에서의 점심 식사> 장면 같은 화기애애한 행복의 시절을 쟁취할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밀려오는 불운에 맞설 수 있는 단단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긍정의 태도였습니다.
돈과 명성, 성공과 우정
무엇도 잡기 힘들었지만

르누아르는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이었습니다.
1841년 프랑스 리모주에서 태어난 그는 1854년부터 도자기 공장에 다녔습니다. 이때가 열세 살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소년공 경험을 한 셈입니다.
당시 르누아르가 맡은 건 도자기에 무늬를 새기는 작업. 르누아르는 이 일을 꽤 잘했습니다.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림에 흥미가 붙었습니다. 점심시간을 쪼개 루브르 박물관에 가는 취미도 생겼습니다.

르누아르의 공장 생활 자체는 길지 않았습니다.
기계화 바람으로 일자리를 잃었거든요. 소년은 원치 않게 실직자 딱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거리를 나다니며 여성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선교사 깃발에 문양을 박아주는 식으로 푼돈을 벌었습니다.
1862년. 르누아르는 아낀 돈, 일로 다진 실력을 안고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 입학합니다.
이제 곧 성공한 화가가 될 줄 알았습니다. 현실은 달랐습니다. 1865년, 신진 예술가의 등용문인 살롱전에 입선하긴 했습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이 성과는 금방 묻혔습니다.
그는 풀 죽지 않고 1866년, 1867년에도 그림을 출품했지만… 역시나 별다른 파란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868년.
드디어 <양산을 쓴 리즈>로 화단을 들썩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당시 연인이기도 한 여인 리즈를 참나무숲 앞에 세운 뒤 그린 실물 크기 그림입니다. 잎사귀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납작한 밀짚모자, 검은색 띠가 걸린 모슬린 드레스, 앙증맞은 양산 등 소품도 눈길을 끕니다.
이제는 비로소 상황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고작 2년 뒤인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 전쟁(보불전쟁)이 터졌습니다. 르누아르는 졸지에 군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성취는 정신없이 떨어지는 포화 속에서 힘없이 나풀거렸습니다.
전쟁의 광풍이 일으킨 계략과 음모에 휘말린 적도 있었습니다. 첩자로 오인당해 하마터면 총살을 당할 뻔한 겁니다. 정말이지 일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르누아르에게는 믿고 기댈 수 있는 단짝이 있었는데요.
프레데리크 바지유. 귀티 나는 깊은 눈매의 소유자였습니다.
둘은 서로가 화가 지망생일 때부터 우정을 다졌습니다. 바지유는 르누아르와 달리 부유한 집안을 둔 예술가였습니다.
다정한 성격도 갖고 있었습니다. 르누아르에게 붓과 물감을 공짜로 안기는가 하면, 아예 자기 화실을 통째로 빌려주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바지유가 죽었습니다.
르누아르 본인은 겨우 살아남은, 보불전쟁에서요. 돌아온 르누아르는 모든 게 원점인 상황을 재차 맞이했습니다. 화상을 찾아 그림을 사달라고 애원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또 다른 절친 클로드 모네 등과 인상파 전(展)을 열고, 몇 차례 실험작도 냈지만… 돌아오는 건 야유와 조롱뿐이었습니다.

돈과 명성, 성공과 우정.
그렇게 열심히 살았건만, 르누아르에게 떨어지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모든 걸 관둔 채 세상을 원망할 법도 하지만….
“불쾌한 것 많은 세상
굳이 그릴 필요 있는가”

생기 가득한 일요일 오후, 파리 몽마르트 지역의 물랭 드 라 갈레트.
샹들리에 불빛, 아카시아 잎사귀 틈 볕뉘가 이곳 안마당에 모인 이들에게 내려앉습니다.
시끌시끌한 공연, 몸을 붙이고 춤추는 연인, 홍조 띤 얼굴로 서로에게 관심을 두는 남녀 등. 달큰한 꽃과 향수 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듯합니다. 곧장 뛰어들어 함께 스텝이라도 밟고 싶은 분위기입니다.
르누아르의 또 다른 대표작, 1876년에 그린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입니다.
그러니까, 르누아르는 나열하기도 벅찬 갖은 악재를 딛고도 이런 포근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꿋꿋이, 끝끝내. 그의 화폭에는 걱정과 눈물, 절망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누군가 물어보면 이렇게 답했다고 하지요.
가뜩이나 불쾌한 게 많은 세상인데, 굳이 그림으로 아름답지 않은 걸 그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먼지투성이 폐허 속에서도 토끼풀만을 찾으려고 하는 자세였습니다.
그런 르누아르에게 사람들은 차츰 감화(感化)합니다. “눈과 마음 모두 뭉클해지는 예술.” 전쟁과 혁명에 지친 사람들은, 그의 따스한 그림을 놓고 조금씩 호평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허할수록 좋은 기운을 품은 무언가와 가까이하려는 건 본능이기도 하지요.

르누아르에게 따라붙는 건 분명 불운밖에 없어 보였는데….
뒤돌아보니 그는 비로소 성공한 화가가 돼 있었습니다. 훗날 배우자가 되는 샤리고를 포함, 수많은 친구와 동료가 자처해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880년께.
르누아르는 이날 <보트 파티에서의 점심 식사>와 같은 풍경 속 감상에 젖었지만, 알고 보면 이는 그의 긍정적 태도가 불러낸 결과였던 겁니다.
대가 없는 행운도 아니고, 원인 없는 우연은 더더욱 아니었던 겁니다.
오직 기쁨 오로지 행복
그것만을 향해 그리다

1881년, 르누아르는 이탈리아 피렌체 등을 유학합니다. 당시 나이는 마흔 살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옛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 산치오와 티치아노 베셀리오의 고전풍 걸작을 봅니다. 르누아르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화풍을 과감히 바꿨습니다. 두 대가처럼 선은 더 분명하게, 묘사도 더 숨김없이, 색채 또한 더 선명하게 구사합니다.
여태 구사한 은은한 인상주의 화풍을 뒤로 하고, 고전 특유의 순수한 표현법으로 방향을 튼 셈입니다.
취향을 드러내는 데도 적극적인 면을 보였습니다.
그는 삶의 후반기에 들어선 여자, 특히나 벌거벗은 성인 여자를 그리는 데 천착했습니다.
신께서 여성의 몸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르누아르는 평소 이런 말을 하고 다닐 만큼 여성 누드화에 큰 관심을 두고 있기도 했습니다.

가령 르누아르의 후기작인 <대수욕도>를 보겠습니다.
이는 그가 완성품을 내놓기 전 도면과 스케치만 수십 장을 만드는 등 3년여간 공을 들인 작품입니다. 화폭 속 여인들은 뚜렷한 윤곽선을 갖고 있습니다.
은은한 미소, 개방적인 자세, 남들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행동은 이들의 당당함과 찬란함을 부각합니다. 빨간 색조의 피부톤, 빽빽하게 그려진 숲과 풀은 몽환적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이는 확실히 그의 옛 그림들과 비교해선 소재와 표현, 기법 등에서 다른 면을 보이지요.
더 노골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변화에 나선 르누아르는 기성 비평가에게도, 인상주의 동료들에게도 마냥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늘 그랬듯 굴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르누아르는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을 지탱해준, 이 원칙만 되새길 뿐이었습니다.
르누아르는 붓을 들 때마다 이 원칙만 되새길 뿐이었습니다.
르누아르에게 그림이란 그런 존재였습니다. 누군가는 그림에 욕망을 담았습니다. 누군가는 혁신을 녹여냈고, 또 누군가는 철학과 시대정신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르누아르가 일관되게 담고자 한 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기쁨. 그러니까, 행복.
그가 두 감정 덕에 살아낼 수 있었듯, 감상자에게도 비슷한 경험을 안기고 싶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림에 행복을 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붓을 든 본인부터 즐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 따라오는 환희의 감정 또한 화폭에 잔뜩 묻어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르누아르는 그렇게 꾸준히 들뜸의 감정을 안겼습니다.
결국은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다 보면, 감상자 또한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을요.
“제 그림을 보는 모든 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르누아르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이 있으니 울림도 있었습니다. 그는 1900년, 프랑스인 최고 영예로 거론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병도 막지 못한 행복의 화가,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풍만한 몸매의 두 여인이 막 목욕을 마친 뒤 여유를 즐깁니다.
바람에 몸도 말릴 겸, 그간 못다 한 이야기도 편하게 할 겸 몸을 뻗은 채 서로를 바라봅니다.
뒤에 선 여인들 또한 물속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듯합니다. 르누아르의 말년작, <목욕 뒤 휴식>입니다.
르누아르의 화풍은 또 한 번 바뀌었습니다. 선은 흐릿하고, 색 또한 거칠게 칠해졌습니다. 돌고 돌아 다시 인상주의 기법을 붙잡은 걸까요. 그가 최종적으로 고전풍과 인상주의 사이 나름의 혼합을 추구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그릴 수밖에 없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병. 손가락을 꺾고, 마디마다 통증을 안기는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이었습니다.
르누아르는 50대가 넘어가면서부터 이 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상태는 나날이 나빠졌습니다. 결국 노년이 돼선 붓조차 제대로 쥘 수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열정을 붙들었습니다. 조수를 시켜 비틀어진 손가락 틈으로 붓을 넣도록 했습니다. 그 상태로 손과 붓을 끈으로 묶어버린 뒤 색을 칠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통증은? 그냥 참아야 했지요. 그러다 보니 그림 또한 비교적 투박해질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밀도는 여전하지만요.
왜 끝까지 절망하지 않습니까.
대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까지 그림을 붙들고 있습니까.
이 물음에, 르누아르는 또 한 번 싱긋 웃으며 답했다고 하지요.
인생의 고통은 지나가 버리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더군요.
놀라울 만큼 강직한, 긍정적인 가치관이었지요.
르누아르는 1919년 12월, 프랑스 남동부 카뉴쉬르메르에서 사망했습니다.
나이는 일흔여덟. 공식 사인은 폐울혈이었습니다. 눈을 감은 당시 몸무게는 50㎏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작업실에서는 720여점의 회화가 나왔습니다. 하나 같이 따뜻한 기운을 품은 작품들이었습니다.

‘고통은 잠시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누구도 아닌 르누아르가 이렇게 말했기에, 이 문장은 굳건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의 꿋꿋한 삶은, 이를 증명하는 찬란한 그림은 지금도 우리 귀에 대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겪어보니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어날 수 있다고.
물론 너무 아프고 너무 억울하겠지만, 한 번 더 세상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자고. 설령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한들,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을 어떻게 꾸밀지는 우리 의지에 달려있을 테니.
참고 자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페터 H. 파이스트, 마로니에북스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

yul@heraldcorp.com